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9-09-28 (토)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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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신경 공부 1 ”

사도신경 공부 ① <전능하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 마가 9:21~24 / 요일 4:7~15

종묘(宗廟)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조선조 때,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입니다. 그러면 종묘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아십니까? 이건 좀 어렵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해 보면 한마디로 애퍼스탈리시티(apostolicity), 즉 사도성입니다. 종묘야말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그렇다면 2천년이 된 우리 기독교에도 뭔가 사도성과 정통성을 표현한 상징물이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엇일까요? 사도신경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는 초대교회의 예배의식입니다. 특히 세례식입니다. 이 세례식 때에 참가자들은 옛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새 사람이 되기를 결단한 표로,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했습니다. (“나는 ~~을 믿습니다. 아멘.”) 그 고백의 내용을 교회는 12항목으로 정리했고 그것이 사도신경입니다. 물론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에서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 눈으로 보면 사도신경은 무척 허술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에는 성경, 성례전, 믿음을 통한 구원, 화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신경(신앙고백)이 그 시대의 문제에 답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시대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완전한 사도신경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오늘날 없애버리거나 대치되어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사도신경은 예나 지금이나 신앙의 일치를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설교와 마찬가지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 늘 새롭게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교리적 선언과 감리교 신앙고백문 : 감리교회의 재해석)

우리 앞에는 “나는 ~~을 믿습니다.”라는 12번의 고백이 있습니다. 물론 진정한 믿음은 사족을 붙일 수 없습니다.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길 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길을 걷다가 마침내 그 길과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로 인도하는 12대문을 열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엄청나게 화가 나서 야단을 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녀를 포기할 수 없어서입니다. 결국 자녀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노아 시대의 타락을 보고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지만 끝내 사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거듭거듭 자기 백성에게 배신을 당하면서도 끝내 사랑을 거두지 못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잣대로 보면 이런 하나님은 참 무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무능함이 우리에게는 전능함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는 폭군의 전능이나 스스로 만든 규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규범의 전능이 아니라, 사랑의 전능입니다. 그 어떠한 방해물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바로의 애굽과 홍해는 자유의 새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능함과 실패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야말로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지혜이셨습니다. 옛 말에, 큰 지혜는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력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펼쳐진 질서만 볼 수 있을 뿐, 접혀진 질서는 하나님이 보여주셔야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다음으로 전능하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속도감이 없습니다. 286컴퓨터 같아서 도저히 참아낼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세상에 개입하시지 않는가?’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신다.”(욥36:5)고 욥기는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촘촘한 그물코처럼 얽혀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안다고 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서두르지 않으신다고 어찌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넘어서지만, 세상을 부둥켜안고 계십니다. 저 멀리 천상에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고, 인간으로 인해 하나님은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때문에 끙끙 앓는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어머니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내일을 위해 이미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시느라 깨어있는 하나님! 인간의 부질없는 권위적인 냄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집을 나간 못난 자식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부둥켜안고 우는 하나님이 곧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지극히 존귀하시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인 초월적인 하나님은 동시에 “겸손한 자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는.”(사57:15)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 전능하신 창조주 /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을 일구어 가시는 하나님,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가,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니 “주님, 불초(不肖)한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배 때마다 기도회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 기왕에 암송하며 고백할 때는 제대로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아버지이시고 어머니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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