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9-10-12 (토)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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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신경 공부 3 ”

사도신경 공부 ③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믿습니다> 누가복음 1:26~38

오늘은 사도신경 공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을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믿음의 가정이라고 해도 요즘은 아기를 갖지 못하는 가정이 의외로 많습니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모든 노력을 다 해봤는데도 아기를 갖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한나를 긍휼히 여기심 같이, 사라와 리브가와 라헬의 태를 열어주심 같이, 제게도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건강한 아기를 갖게 되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기를 갖게 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 아기는 “내가 낳았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기쁘지만 참 힘든 축복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순탄하지 않게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우리는 신앙을 담아 한 줄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믿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고백은 생물학적인 차원의 진술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잉태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이나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동정녀 탄생이 생물학적으로 가능한가?’를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성의 역할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다는 이 신앙고백에 담긴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뭘까요? 우리가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하늘나라에 속해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잉태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예수 탄생을 증언하는 것이고, 인간 아버지가 부정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대개 건너뛰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정말로 중요한 메시지가 있으니까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에서 보듯이 낳고, 낳고로 이어지는 이 족보의 끝에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마태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틀을 깨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는 여기서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로 바뀌었고, 낳았다는 능동적인 표현은 태어났다는 수동적인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족보에 나오는 이전의 어떤 사람들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인간인 어머니의 세계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영원한 분이 인간의 시간 속에 들어오실 때 여성의 태를 이용한다는 것은, 남성 중심의 질서가 지배하는 당시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남성이 배제되고 여성의 역할이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이 세상의 일상적인 방법인 부(富)나 권력(權力)이나 성(性)이 아니라 겸손과 약함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부조리와 불신앙을 바로잡으러 오신 예수님의 무기는 겸손연약함입니다. 싸우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소유하고, 명성을 얻으려는 남성적인 힘들이 부딪쳐 일어난 수많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서는 여성적인 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로잡으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지배하러, 심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섬기러,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구유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끝난 인생, 벌거벗은 채 사람들의 손길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예수께서,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과 피를 가지고 있었던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다고 고백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역사와 근본적으로 연관되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났기에 우리처럼 아파했고, 고민했고, 고난 받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할 수 있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와 믿음을 갖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만능이다 하는 사람들과 의심부터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비웃습니다. “예수쟁이들, 말도 안 되는 것을 믿고 있구먼. 차라리 돈을 믿겠다. 내 지식과 경험을 믿겠다.” 자기만 똑똑한 채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보고 “기독교는 아직도 무지몽매함 속에 머물러 있다. 어쩜 저렇게 어리석을까.”하고 비판합니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다.”고 매도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거듭거듭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지요?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는 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족!

만약에 마리아가 “이 몸은 주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대답하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대답은, 목숨까지 내놓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게,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옵니다. 부모와 약혼자가 누구의 아이냐고 당연히 물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대답한다면 과연 그들이 그 말을 믿겠습니까? 믿기는커녕 신성한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 마리아는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높고 깊고 크고 거룩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총과 마리아의 믿음 사이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계획과 꿈을 위해 자신의 태를 내놓을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품고 세속적인 즐거움과 편안함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마침내 죽음에 맞서서 생명을 낳고야 마는 오늘의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바로 당신이어야 합니다. 내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종이 잠잠히 듣겠습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대답할 줄 아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 당에 보내주신 하나님, 저희의 얄팍한 지식과 생각 안에서만 믿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태어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우리도 날마다 다시 태어나는 인생을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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