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9-10-05 (토) 16:23
ㆍ추천: 0  ㆍ조회: 107      
http://slowstep.org/home/?slowstep.2160.21
“ 사도신경 공부 2 ”

도신경 공부 ②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마태복음 16:13~20

얼마 전, 초등학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받는 전화여서 그런지 친구의 목소리가 무척 반가웠습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 친구와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사업이 잘 안 돼서 무척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조그만 사업체를 경영하며 열심히 노력하던 친구였는데, 그 소식을 듣고 저도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래서인가요, 그 친구는 우리사회에 대해 불만이 참 많았습니다. 아니, 불만을 넘어 오히려 증오에 가까웠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나라에서는 세금만 뜯어가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 아직도 이 나라는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이 썩어빠진 사회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게 종교인데... 아참 너 목사님이지? 날 위해서 기도해주라. 나는 솔직히 이 나라를 뜨고 싶어!”

이 나라, 이 사회에 대해 희망을 잃어버린 그에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친구의 말이 많은 부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내가 기도해 줄게, 힘내!”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다보니 그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그의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 줄 의지처였습니다. 언제든 다가가 기댈 수 있고, 울 수 있고, 상의할 수 있고, 인도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준엄한 꾸중으로 우리의 삶을 제자리로 되돌려주는 존재 말입니다. 그래서인가요, 그 친구에게 “교회에 한 번 나가보지. 예수님을 한 번 믿어보지 않을래?”하고 말하지 못한 게 무척 후회스러웠습니다. 여러분, 제 아무리 강한 척하는 사람도 하나님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그런대도 우상이 없이는 기다리지 못하는 게 사람 아닙니까. 사람은 자기의 삶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섬깁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가 취해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데올로기, 돈, 명예, 권력, 출세, 쾌락의 얼굴을 한 가짜 신들에 취해 사람들은 흥청거립니다. 자, 그런대도 우리는 예배 때마다 또 날마다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유에 대한 포기입니까, 아니면 노예처럼 비굴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상의 자유와 좀 다릅니다. 세상의 자유는 돈을 주고 살 수 있습니다. 우정을 빙자하여 잠시 집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으면, 우정이 깨지면, 그 자유는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슨 일을 만나든 흔들림 없는 자유를 말합니다. 애쓰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남을 없애기 위해, 미워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려는 사랑의 애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우리의 생각을 막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진정한 자유, 즉 사랑의 실천에 동참할 자를 찾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그 사랑을 실천할 때에만 그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내 삶의 목표라는 말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바른 길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분이 가신 길을 나도 걸어서 영생에 이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산청돈암교회 교우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다짐하며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고통과 슬픔이 닥쳐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풍조와 유혹에 저항합니다. 문화식민주의, 민족주의, 과학만능주의, 성적지상주의, 신자유주의, 물질만능주의와 당연히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주도권을 내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넘겨드리고 삽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에게 분명히 물어보아야 합니다. ‘정말 나의 주인은 예수님인가?’ 나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결정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대화에서, 정작 주님은 소외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주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까?’를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단호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고, 또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의미를 담아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내적으로 하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외아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표현할 때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다른 아들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모순이 아닙니까? 네,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담겨 있는 속뜻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 아내, 아들, 딸, 손자, 손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지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면, 그래서 그분 한 분만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로 작정하면, 다른 어떤 것도 그 사람에게는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일한 분, 하나님의 외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영원을 보고, 생명의 무궁함을 보고,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에 온전히 사로잡혀, 그분을 따르려고 작정한 이들, 곧 예수님이 꿈꾸었던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려는 바로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을 고백할 때, 다른 사람이 예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고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대답은 ‘고백’입니다. 그 고백조차 베드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자기 것은 없고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찼을 때 베드로는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온전하게 신앙을 고백함으로, 주님의 교회인 산청돈암교회의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이신 주님, 신앙의 길을 길이신 주님과 함께 걸어가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어두워도 방향을 잃지 않고, 유혹이 심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사랑으로 선택했기에 사랑으로 열린 길, 이 길을 따라 오늘도 찬송하며 걸어가게 하옵소서. 길을 가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이어주는 길이 되어서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로 함께 이르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0
3500
착시현상
  그림의 실상은 고정되어 있는데,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착시현상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내 마음과 생각도 저렇게 흔들렸습니다. 예배 드릴 때도 그랬고, 교우들과 점심식사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그냥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가볍게 넘겨버릴 수가 없어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대신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저건 이거다. 이건 저거다." 단언을 해도 그게 참일 가능성보...

 [2020/01/30 20:31]
주기도문 공부 8
주기도문공부⑧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역대상 29:10~13, 시편 145:10~13 오늘은 ‘주기도문 공부’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 마지막 기도는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에 해당됩니다. 앞에서 여러 가지를 간구했는데, 우리가 왜 하나님 아버지를 감사한 마음으로 경배해야 하는지, 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전부터 사용해온 주기도문에는 ‘대개(大蓋)’라는 말이 있는데, 큰 대자...

 [2020/01/11 18:18]
주기도문 공부 7
주기도문공부⑦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시141:8~9, 약1:12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 있는데, 그 제목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교회 안팎에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던 소설입니다. 복음서에 없는 내용을 가정해서 썼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그것은 뭐 거창한 게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

 [2020/01/04 10:19]
주기도문 공부 6
주기도문공부⑥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시편51:6~9, 마태6:14~15 신앙생활 하면서 지금까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힘들었던) 게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고 했는데 복은커녕 쪽박 차게 생겼다고 합니다.(복의 문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은 다 하는데 나만 방언을 하지 못하니 속상하고 창피하다고 합니다.(은사의 문제) 어떤 사람은 무조건 죄인 취급하는 교회의 분위기가 싫다고 합...

 [2019/12/28 17:35]
주기도문 공부 5
주기도문 공부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마태 6:11 요한 6:51 주말만 되면 마트마다 쇼핑객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이 사는 것을 보면 대부분 식료품입니다. 카트가 넘칠 정도로 식료품을 채워 계산하는 사람들마다 웃음꽃이 핍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 ‘저걸 다 먹을 수 있을까.. 버리는 쓰레기도 어마어마할 텐데..’ 물론 먹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들을 배가 터...

 [2019/12/21 17:44]
주기도문 공부 4
주기도문 공부④ <주님의 뜻이 땅에서도> 마가 14:32~42 우리가 살아온 지난 100년 동안 그리고 이 21세기에도 세계에 많은 전쟁이 있었고 또 계속되고 있으며,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러한 전쟁과 살육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전쟁이 사라지고 모든 나라가 평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독재자와 자본가들의 억압도,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일도, 병든 문화로 인해 사람의 몸과 마음...

 [2019/12/14 18:45]
주기도문 공부 3
주기도문 공부③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이사야11:1~9, 마가1:14~15 ‘예수 믿고 복 받자! 예수 믿고 천국 가자!’ 신앙생활을 오래 한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들어봤을 구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왕에 사는 거 현세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천국에 가는 건 죽어 봐야 안다고 생각하시나요? 잘 모르시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주기도문 공부 세 번째 시간으로 천국, 즉 ...

 [2019/12/07 17:03]
주기도문 공부 2
주기도문 공부②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계 4:8~11 오늘은 주기도문 공부 두 번째 시간으로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름은 곧 그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리운 추억, 아련한 향수, 또 잊고 싶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의 시작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이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이름을 떠올리다 보면 왠지 외로워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외로운가봅니다. 그런데, 외로울 때...

 [2019/11/30 17:17]
주기도문 공부 1
주기도문 공부 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 6:9~13 / 로마 8:14~15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학장을 지낸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님이 쓴 <하찮아진 하나님>이란 책이 있습니다. 현대인과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여러 가지로 관찰하고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맥컬로우 목사님은 현대인이 ‘세 가지 우상’을 섬...

 [2019/11/23 14:32]
사도신경 공부 8
사도신경 공부 ⑧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골로새서 3:1~4 ‘몸’처럼 서러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요즘 같은 환절기면 몸은 쉽게 피곤해지고 질병에도 쉽게 노출되지요. 그리고 해가 갈수록 이 몸은 점점 약해지고 주름만 늘어갑니다. 그래서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살아간다는 것은 이래저래 힘겨운 일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나오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

 [2019/11/16 18:11]
12345678910,,,46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234번길 30 (사리 900-60). admin@slowstep.org / Copyright (c) SlowSte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