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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신경 공부 ②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마태복음 16:13~20
얼마 전, 초등학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받는 전화여서 그런지 친구의 목소리가 무척 반가웠습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그 친구와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사업이 잘 안 돼서 무척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조그만 사업체를 경영하며 열심히 노력하던 친구였는데, 그 소식을 듣고 저도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래서인가요, 그 친구는 우리사회에 대해 불만이 참 많았습니다. 아니, 불만을 넘어 오히려 증오에 가까웠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나라에서는 세금만 뜯어가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 아직도 이 나라는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이 썩어빠진 사회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게 종교인데... 아참 너 목사님이지? 날 위해서 기도해주라. 나는 솔직히 이 나라를 뜨고 싶어!” 이 나라, 이 사회에 대해 희망을 잃어버린 그에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친구의 말이 많은 부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내가 기도해 줄게, 힘내!”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다보니 그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그의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 줄 의지처였습니다. 언제든 다가가 기댈 수 있고, 울 수 있고, 상의할 수 있고, 인도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준엄한 꾸중으로 우리의 삶을 제자리로 되돌려주는 존재 말입니다. 그래서인가요, 그 친구에게 “교회에 한 번 나가보지. 예수님을 한 번 믿어보지 않을래?”하고 말하지 못한 게 무척 후회스러웠습니다. 여러분, 제 아무리 강한 척하는 사람도 하나님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그런대도 우상이 없이는 기다리지 못하는 게 사람 아닙니까. 사람은 자기의 삶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섬깁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가 취해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데올로기, 돈, 명예, 권력, 출세, 쾌락의 얼굴을 한 가짜 신들에 취해 사람들은 흥청거립니다. 자, 그런대도 우리는 예배 때마다 또 날마다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유에 대한 포기입니까, 아니면 노예처럼 비굴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상의 자유와 좀 다릅니다. 세상의 자유는 돈을 주고 살 수 있습니다. 우정을 빙자하여 잠시 집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으면, 우정이 깨지면, 그 자유는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슨 일을 만나든 흔들림 없는 자유를 말합니다. 애쓰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남을 없애기 위해, 미워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려는 사랑의 애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우리의 생각을 막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진정한 자유, 즉 사랑의 실천에 동참할 자를 찾는, ‘사람을 찾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그 사랑을 실천할 때에만 그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내 삶의 목표라는 말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바른 길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분이 가신 길을 나도 걸어서 영생에 이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산청돈암교회 교우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다짐하며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고통과 슬픔이 닥쳐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풍조와 유혹에 저항합니다. 문화식민주의, 민족주의, 과학만능주의, 성적지상주의, 신자유주의, 물질만능주의와 당연히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주도권을 내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넘겨드리고 삽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에게 분명히 물어보아야 합니다. ‘정말 나의 주인은 예수님인가?’ 나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결정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대화에서, 정작 주님은 소외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무슨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주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까?’를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단호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고, 또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의미를 담아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내적으로 하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외아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표현할 때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다른 아들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모순이 아닙니까? 네,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담겨 있는 속뜻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 아내, 아들, 딸, 손자, 손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지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면, 그래서 그분 한 분만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로 작정하면, 다른 어떤 것도 그 사람에게는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일한 분, 하나님의 외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영원을 보고, 생명의 무궁함을 보고,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에 온전히 사로잡혀, 그분을 따르려고 작정한 이들, 곧 예수님이 꿈꾸었던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려는 바로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을 고백할 때, 다른 사람이 예수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고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대답은 ‘고백’입니다. 그 고백조차 베드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자기 것은 없고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 찼을 때 베드로는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온전하게 신앙을 고백함으로, 주님의 교회인 산청돈암교회의 초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이신 주님, 신앙의 길을 길이신 주님과 함께 걸어가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어두워도 방향을 잃지 않고, 유혹이 심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사랑으로 선택했기에 사랑으로 열린 길, 이 길을 따라 오늘도 찬송하며 걸어가게 하옵소서. 길을 가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이어주는 길이 되어서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로 함께 이르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