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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공부 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다> 고전 15:1~11, 히 4:14~16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북새통을 이루며 몰려들던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버림 받은 채 설 땅을 잃고 죽임을 당한 예수님,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갈릴리에서부터 그를 따르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어디 마음껏 소리 내어 슬피 울 수나 있었습니까? 숨죽인 흐느낌으로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따라갔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마련해 두었던 무덤, 아무도 묻힌 적이 없던 그 무덤에 예수님은 모셔졌습니다. 그리고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사흘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지요. 예수님 없는 세상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 앞에서, 그분을 사랑하던 이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해조차 빛을 잃었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기록했는데, 그분이 없는 사흘 동안은 별고(?)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 왜 그리도 모순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인생의 길이 끝나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 우리를 가두고 마는 무덤은 정말 인생의 끝입니까? 비목(碑木)조차 세우지 않은 예수님의 무덤은 그분이 꿈꾸었던 세상이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참담한 표징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덧없는 인생에 붙여진 덤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 뱃속과도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누웠던 사흘은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장사한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을 믿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무에 새순이 나듯,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언덕 골고다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목청껏 노래합니다. “예수 부활하셨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어야 산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싫습니다. 지금 당장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싫습니다. 요즘 살기가 힘들어졌다고 너도나도 절약, 절약 하지만 절약하면 가진 게 적어집니다. 절약에서 오는 가진 없는 불편도 싫습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편히 살다가 부활에만 참여하고 싶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하고 싶어 합니다. 남긴 것 하나 없이 남의 무덤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은 죽어서 사는 길을 가르치시는데, 어떤 사람은 죽지 않고 사는 길을 가르치며 배를 불립니다. 배가불러 포효하기를 잊은 사자처럼 이제 더 이상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타락한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자만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묻혔던 그 무덤에 우리가 온전히 묻히지 않고서는 다시 살아날 수 없음을,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본질에서 멀어진 삶을 살고 있습니까? 누누이 말하지만 죽어야 삽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처럼 죽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이란,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등불을 밝혀들고 어둠을 향해 온몸으로 돌진하다가 죽은, 빛으로 살다간 이들이 있습니다. 비록 묵은 소금으로 살았지만 끝내 자신을 녹여 짠맛을 낸 이들도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택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죽어서 산 자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아무쪼록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살지 말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을 변질시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장품조차 남기지 않은 예수님의 무덤, 텅 비어 향기만 가득한 그곳에서, 빈손 빈 마음에서, 영원한 나라에 이르는 길이 시작됩니다. 비우고 또 비워 가벼워진 몸에 하나님께서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을 믿습니다.”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왜 그렇지요? 해마다, 내가 죽지 못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매 주마다 맞이하게 되는 주님의 부활일, 주일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은 부활로 끝이 났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서적 의미에서의 하늘은, 푸른창공이나 달나라나 저 우주의 끝 어디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따라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에 온전히 머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예수님은 비로소 모든 이들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한 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체를 지닌 사람으로 이 땅에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넘기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오르심으로, 예수님은 어느 때 어느 곳에든지 언제나 계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의 아픈 속내를 헤아리시면서, 또 다른 사람의 상처 입은 가슴을 쓸어주실 수 있습니다. 믿는 이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난스러운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하필이면 오른편인가? 왼 편은 안 되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오른쪽을 좋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다로 제자들을 찾아가셨을 때, 밤새도록 빈 그물질에 지친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그물을 내려 보라고 하시며 가리킨 곳도 오른쪽이고, 시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때도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입니다. 왜 그렇죠?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왼쪽은 불길함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좀 유식한 말로 언어가 갖는 원초적 이데올로기라고 하는데, 우리 아이들이 왼손잡이가 되는 것을 꺼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왼쪽을 뜻하는 영어 left는 기본적으로 약하다, 가치 없다, 어설프다는 뜻이 있고, 오른쪽을 뜻하는 right는 옳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른’은 ‘옳은’에서 나왔고 ‘왼’은 그르다는 뜻의 옛말 ‘외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곧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분으로 고백하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말속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신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왼편은 왜 비어있을까요? 왜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비워 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약하고, 무가치하고, 어설프기 그지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온몸으로 살아내려고, 애씀을 통해 채워가야 할 우리 몫의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왼편의 자리는 많습니다. 그 자리에 여러분 모두가 앉을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신적인 위엄 가운데 역사에 대한 전권자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다는 말입니다.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던 분이 하늘의 보좌에 오르시는 이 극적인 사건을, 신앙고백의 언어 말고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만유의 주 하나님,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력을 우리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가 낙심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 소망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