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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공부 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 6:9~13 / 로마 8:14~15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학장을 지낸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님이 쓴 <하찮아진 하나님>이란 책이 있습니다. 현대인과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여러 가지로 관찰하고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맥컬로우 목사님은 현대인이 ‘세 가지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우상은 나의 목적에서 비롯된 신이요, 둘째 우상은 나의 이해에서 비롯된 신이요, 셋째 우상은 나의 체험에서 비롯된 신이라 했습니다. 1. 목적 - 현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기보다는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방편으로 그 욕망이 채워질 때 하나님은 쓸모없는 하나님이 됩니다. 나의 목적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무조건 좋으신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을 현대인은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하찮게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2. 이해 -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마치 하나님을 다 알고 있는 양, 자신의 생각 속에 하나님을 가둬두는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체험 -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종교체험을 절대화하기 마련이고, 그 체험 속에 하나님을 가둬둡니다. 이것은 지식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신앙생활 기간이 길고 짧음을 떠나서, 성직자든 평신도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그 함정에 빠질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한 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때로는 이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생활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신앙체험이 있어야지요.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을 자신의 체험 안에 가둬두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눈을 가지고 보는 하늘이 하늘의 전부가 아니고, 나의 경험을 가지고 보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전부가 아닌데, 그것을 진짜 하늘이요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때 문제가 됩니다. 그 하나님은 결코 나보다 더 클 수 없는, 나를 초월하지 못하는, 하찮은 하나님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출발은 ‘바른 기도생활’에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특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대한 공부 없이는 결코 올바른 신앙을 만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첫 단계로 기도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아버지!’ 그뿐입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 그리고 나팔 소리와 함께 강림하는(출19:16) 하나님, 그분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 공포와 경외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라,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방탕한 아들을 먼발치에서 보고 달려 나가 그를 부둥켜안는 아버지(눅15:20). 우리가 그분과 거리를 두고 그분 아닌 다른 것에 몰두하는 것을 가슴아파하는 분. 우리가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것을 슬퍼하시는 분.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고 무조건 많고 큰 것만을 요구하는 것을 슬퍼하시는 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와 교제하며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분.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분.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분입니다. 울타리를 둘러치고, 곳곳에 금으로 만든 팻말을 써 붙이고, 무서운 징벌로 위협하며,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분이 아니라, 때로는 울타리 밖으로 달려 나가는 자식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파하는 사랑으로 기다리는 아버지,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바르게 아는 사람이어야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르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이고,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이며,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것일까요? 하늘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천국인가요, 천당인가요? 시편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121:1).”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득한 일을 만나면 사람들은 먼 곳을 바라봅니다. 아득한 허공에 시선을 보냅니다. 수해로 인해 쓰러져버린 벼 포기를 바라보다 기가 막혀 주저앉아 허공만 바라보는 농부의 시선은 무엇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하고 영정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유족의 시선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요? 손 때 묻은 집기들을 정리하고 동료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뒤로한 채 회사 문을 나서며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는 실직자들의 눈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대상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은 텅 빈 시선,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이 바로 ‘하늘’입니다. 이글거리는 욕망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곳, 헛된 상념을 버리고 텅 빈 눈빛으로만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들꽃 한 송이에도 있고, 짐승들에게도 있고, 연인들의 사랑의 눈빛에도 있고, 우리의 한숨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는 천당에 계시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던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늘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공부하다가 이 놀라운 진리를 깨우치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는 “하늘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하늘입니다.”(에벨링) 사람은 결코 하늘을 가를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하늘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이름으로 하늘을 독점하려는 유대교의 오만을 꾸짖으셨습니다. 누군가를 죽임으로 자기가 살려고 하는 종교는 이미 하늘을 잃어버린 종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큰 목소리로 함께 해보실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왠지 느낌이 잘 안 오지요? 왜 그럴까요? 아직 우리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음 속 깊이 드리기에는, 하늘 아버지를 간절히 부르기에는, 아직도 우리의 마음이 순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한마디를 바로 할 수 있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참으로 교회와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기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압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말이 적어지는 법, 주님아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가 드릴 모든 기도의 본이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