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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늘 즐거워할 이유 (로마 5:1~11) - 로마서 묵상 15 믿음으로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은 ‘우리’에게 무엇이 따라올까요? 바울은 본문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은 우리에게 어떤 보상이 약속되어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 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 ‘절대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1절 : “화평을 누리자” 이 말이 다른 사본에서는 “화평을 누린다” 또는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서술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아, ‘누리자’보다는 ‘누리게 되었다’로 옮기는 것이 무난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그분과 다투어 왔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과 다툰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맞서서 다툴만한 상대가 못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새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이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를 책망하지 않고 조건 없이 받아들입니다. (누가15:11~24) 사람과 하나님 사이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the ground of being)입니다. 나무로 비유하면, 그것의 뿌리입니다. 또는 그것이 뿌리박고 서 있는 대지입니다. 나무가 대지에 든든히 뿌리박고 서 있는 것, 그것이 화평입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화평이 아니라, 안에서 우러나는 화평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빼앗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절대 평화입니다. 2절 : 믿음으로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은 ‘우리’에게는 오직 즐거워할 일만 있습니다. 여기, ‘즐거워한다’는 말 속에는 ‘기뻐한다’ 또는 ‘자랑스레 여긴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까닭은 첫째, 그분(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 자체가 그분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두 번째 이유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공동번역) 희망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기뻐하고 또 기뻐할 이유만 있는 것입니다. 3~4절 : 바울이 이 글을 쓸 때 그리스도인들은 ‘환란 중에’ 있었습니다. 예수를 처형한 세력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환란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즐거움)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환란 자체가 기쁨의 또 다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환란을 당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는 게 아닙니다. 환란을 당하여, 오히려 그 때문에 즐거워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환란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연단을 낳고 연단이 소망을 낳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로마8:28) “인내가 연단을 낳는다”는 말은 ‘단련된 품성’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잘 단련된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해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더욱 간절하게 희망합니다. 5~6절 : 희망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경우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희망일 경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참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희망을 이룰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벽하게 드러났으니,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시련을 이길 만한 힘을 얻기 전, 그러니까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입니다. 그분의 은총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 선택적으로 베풀어진 것이 아닙니다. 7~8절 : 의인과 착한 사람을 굳이 구별해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훌륭한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거늘 하물며 ‘죄인’을 위해 죽는다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이유 없으신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찌 있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쏟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9~11절 :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 마침내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시냇가에 나무가 뿌리를 내렸으니 참으로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