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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버지 (로마 8:12~18) - 로마서 묵상 24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일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죽은 군인들과 민간인들. 그러나 과연 그들만 죽은 사람들일까요?) 그런 뜻에서, 사지 멀쩡한 몸으로 돌아다니지만, 과연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늘나라는 살아있는 자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고요.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져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과 이웃과 온 세계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면, 그것을 일컬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14절 : ‘빚진 자’라는 말은 무엇을 얻어서 가지게 된 자, 즉 처음부터 자기 것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입니다. 육신도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영혼도 물론 그렇습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선 자기 몸부터 자기 것이 아닌데, 그 몸에 있는 무엇이 자기 것이겠습니까? - “육신에게 빚진다”는 말은 육신을 주인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이 다만 육신의 법을 따라 살게 되는데,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죽은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에게 죽음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런데 ‘시간문제’라는 말은, 이미 모든 것이 결판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니 육신만 가지고 말한다면 태어날 때 벌써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육신만 가지고 사는 자에게는 지금 죽으나 수십 년 뒤에 죽으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사이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아침에 죽는 것과 저녁에 죽는 것이 하늘땅만큼이나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도를 얻지 못한다면 천 년을 살든 만 년을 살든 그 오랜 세월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하루라는 삶’을 얻어 육신을 부지(扶持)하는 데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15절 :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새번역) 생각해보십시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겁내지 않습니다. 그것도 젖먹이 어린아이는 결코 아버지를 겁내는 법이 없습니다. - 그동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마가14:36). 바로 그 예수님의 영을 물려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 ‘아바 혹은 아빠’는,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호칭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어린아이같이 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응석 부리며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우리도 스스로 젖먹이처럼 낮아져,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6~17절 : 언젠가 교리 공부 중에 말한 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어떤 관계입니까? - 서로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입니까? -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한데, 이는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비유로 말하면, 물과 물결의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물이요, 우리의 영은 물결입니다. 물과 물결은 하나지만, 그러나 같은 것도 아닙니다. 물결은 스러지지만, 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그렇게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녀는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영광을 상속받으셨듯이,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결코 영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고난과 영광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명심할 것은, 고난이 먼저요 영광이 나중입니다. 씨 뿌리는 것이 먼저요 추수가 나중인 것과 같습니다. 이 순서를 내 마음대로 뒤집거나 무시하여 건너뛰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18절 : “현재 우리가 받는 고통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줄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육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적인 것을 생각하고, 영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어둠에 묻힌 빛으로 살지, 빛을 묻은 어둠으로 살지, 몸을 갖춘 영으로 살지, 영을 지닌 몸으로 살지, 우리는 양다리를 걸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명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