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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로마 12:1~3) - 로마서 묵상 34 지금(11장)까지 바울은 죄를 지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道)’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그 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자세하게 길을 설명해 주었어도 그대로 가지 않는다면, 앞에 한 모든 설명이 허사로 돌아가고 맙니다. 예수께서도 당신을 보고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 12장부터는 바울의 권면이 이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보다 그대로 따르는 실천이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한가지 기억해 둘 것은, 지금(12장)부터 전개되는 바울의 말씀이, 이렇게 살면 그 대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권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순서를 뒤집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실천)보다 은총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1절 : ‘제물’이란, 신에게 바쳐진 물(物)입니다.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면 ‘양이 제물’입니다. 그런데 양은, 자신을 제물로 바칠 능력을 스스로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제단 위에 자기 몸을 눕힐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도 있고 물론 바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양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아버지께 스스로 바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은 온전한 능동(能動)과 온전한 수동(受動)의 완벽한 일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아무도 그분을 강제할 수 없었지만, 당신 뜻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일상은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은 이미 자신의 몸과 함께 자유의지를 신에게 바쳤으므로, 더 이상 살아있는 목숨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쉬지 않고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렇게 살아있기에,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개념에는 모순의 통일성이 보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주검’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갈2:20을 함께 읽는다. 304쪽)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바쳐진 산 제물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기에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영’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흐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몸을 하나님께 바쳐서 죽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쳐야 하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의 삶은, 그 자체가 거룩한 예배입니다. - 구원과 예배에 얽힌 이 놀라운 신비를 늘 기억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2절 : 그렇다면, ‘삶이 그대로 예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부정(否定)의 길’인데,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이 세대란, 아담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命)을 알면서도 어기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길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넓은 길을 함께 걸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감각의 대상만을 따라서 살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무엇을 본받는 일은 그것과 늘 가까이 있을 때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온종일 기계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기계를 닮고, 독재자와 싸우는 사람이 독재자로 변해 있듯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과 가까이 있으면, 세상을 닮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면, 감각이 닿는 곳 저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온갖 현상(現像)에서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상(眞想)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본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긍정(肯定)의 길’인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고 기쁨을 안겨주며 온전하십니다. 그래서 그 뜻을 분별하려면,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깨끗한 마음이란, 거울처럼 맑아서, 보이는 대상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 마음, 그래서 보고 싶은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보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거룩한 백성’이라 부릅니다. 3절 :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지체가 되는 것이 곧 바울의 교회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전체인 교회의 생명은 개체인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하는 데 있습니다. 손은 손의 일이 있고 발은 발의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해도 분수에 넘치는 의욕을 품으면, 반드시 화(禍)를 부르게 되어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