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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에 복종하라 (로마 13:1~10) - 로마서 묵상 37 사람은 영(靈)을 모신 육(肉)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입니다. 사람의 중심은 육이 아니라 영에 있습니다. 물론 영과 육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므로, 이것을 중요시하면서 저것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후(先後)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일진대, 육이 아니라 영의 자리에서 만사를 보고 처리함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영이 육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비겁한 굴복’이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는 문장을 그의 서신에 써넣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건 사람이 얼마나 장수를 누리며 오래 사느냐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루를 살더라도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빌립3:12b) 따라가는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두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산다면, 그 ‘오늘 하루’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서 자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에, 그래서 가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질 아까운 기회를 잃게 될까 봐 그것을 우려하여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가는 일은, 아무리 불의한 폭군의 다스림 아래에서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불의한 권세를 두둔하고 정당화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을 방해할 수 없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 빌라도의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요한19:11)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빌라도의 권세를 거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복종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은, 세속 권세에 저항하는 데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명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권력자의 눈에 ‘저항’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권력과 정권은 같지 않다.) 3~4절 :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말은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권세도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막거나 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쪽의 순수한 사랑을 권력자의 쪽에서는 불순한 저항으로 보고, 억압하고 박해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는 권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권세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권세라는 것이 거의 그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한마디쯤 해명하는 말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기는 바울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고, 어쩌면 이 편지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로마의 권력자에게도 읽힐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울의 유일한 목표가 오직 복음을 널리 전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권력자들의 비위를 건드려서 박해를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본문은, 그 뜻을 잘 헤아려 읽어야 할 대목입니다. (권력자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 5절 : 이왕 굴복할 바에야 벌(罰)을 겁내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스스로 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다가 박해를 받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6~7절 : 물처럼 살라는 말인가요?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그러려는 의지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물의 성질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영생의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공세와 국세 바치는 일이나 권력자에게 복종하는 일로 그 길이 가로막히지 않습니다. 8절 : 무엇을 주면 준 만큼 받게 되듯이, 무엇을 받으면 받은 만큼 갚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고받는 것은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두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갚을 것을 갚지 못하면(않으면) 빚으로 남습니다. 바울은 그 누구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합니다.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인데,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사랑의 빚’만큼은 져도 됩니다. 될 뿐만 아니라 많이 질수록 좋습니다. 사랑이란, 주는 만큼 덜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줄수록 더욱 많아지는 신기한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남에게 베푸는 일은 곧잘 하는데, 남에게서 받는 일은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건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받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남으로 하여 사랑을 베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결코 바람직 한 일이 아닙니다. 9~10절 : 사랑은 ‘0’(零, zero)과 같습니다. 아무리 큰(작은) 수도 ‘0’과 곱하기로 만나면 ‘0’이 됩니다. 그래서 ‘0’은 숫자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이신 하나님과 곱하기로 만나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지켜야 할 계명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