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나님이 불의를 저지르셨나? (로마 9:1~18) - 로마서 묵상 27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신 종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엡3:8~9)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바울은 자신이 오직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이스라엘과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던가요? -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극단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1~3절 :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참말을 하는 사람! 세상에서 흔히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靈) 안에서 그의 양심이 말을 했습니다. - 어렸을 적에 우리는 거짓말을 하거나 그릇된 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만큼 양심이 건강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날마다 양심을 외면하고 억누르는 삶을 거듭하다 보니, 바야흐로 양심의 소리가 모기 소리보다 더 작아졌습니다. 이제는 일부러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판단을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내리려는 우리 현대인의 치명적인 병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양심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습니다. 진짜 ‘나’ 자신은 머리도 손발도 아닌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가리킬 때 가슴에 손을 얹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바울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중심으로 삼고 산 사람입니다. 그는 동족인 이스라엘을 가슴으로 근심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도, 오랜 습관에 따라 기계처럼 저절로 일어났다가 꺼졌다가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는 양심입니다. 나로 더불어서 증거한다는 말은,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깨어있는 마음만이 살아있는 마음입니다. -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4~5절 :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뒤에 유대인의 존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조상 야곱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여러 특권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을 누리며,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서 받은 약속이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을 비롯한 조상들이 있고, 게다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같은 분인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혈통을 빌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특권을 유산으로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차린 잔칫상도 내가 입을 벌려서 먹지 않으면 그림에 떡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큰 복(福)이 큰 화(禍)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6~13절 : 하나님의 잔칫상을 사람이 거절하면, 그러면 그 잔칫상은 무효가 되나요? 이와 같은 물음에 바울은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아먹을 사람을 준비하지 않은 채 잔칫상을 차리지 아니하신다고. - 어떤 사람이 거절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은총과 함께 그 은총을 받아 누릴 사람을 따로 마련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의 혈육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세례자 요한의 것이기도 합니다(눅3:8).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말고도 후처인 그두라를 통해 여섯이 더 있지만, 이삭이 유일한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은, 그가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혈통으로 내려온 이스라엘이 아니라, ‘약속의 열매’로 태어난 이스라엘을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으로 보는 바울의 견해는,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주장으로 연결됩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이 시대의 하나님 백성입니다. 14~18절 :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절대주권 앞에서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뜻의 실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웅변이 비록 힘차지만, 그래 봤자 진실의 반쪽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고집 앞에서 속수무책인 하나님에 대하여 동시에 증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선민(選民)이란, 선택받은 민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 연관하여 터무니없이 우쭐거리거나 주눅 들 필요가 없습니다. - 내 고집대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종하며 살 것인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