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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로마 14:1~12) - 로마서 묵상 39 주님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데는 그럴만한 이유와 근거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물을 본다면, 우리에게도 남을 판단할 자격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보지 못합니다. 그분은 무엇을 보시든지 당신 혼자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함께 보십니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8:16) 같은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 눈을 한 쌍씩 가지고 있는 이유는, 외눈보다 두 눈이 더 정확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에 견주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당신의 눈과 아버지의 눈을 함께 사용하여 보시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은,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모두 정확한 판단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함께 보는 눈’을 뜨게 되기 전까지는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사물을 ‘아버지와 함께’ 본다는 것은, 그것의 위, 아래, 옆, 속, 겉과 그것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물의 부분과 전체가 바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눈이 없습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우리 ‘육신’이 온전히 죽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그 무엇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1~2절 : 신앙공동체도 결국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안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말은 믿음이 깊다는 말이고, 약하다는 말은 믿음이 얕다는 말입니다. 개울이 흘러 강이 되고 강이 흘러 바다가 되듯이, 믿음이 약한 사람은 개울과 같고 그보다 강한 사람은 강과 같고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은 바다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울은 강의 상류요 바다는 강의 하류입니다. 강이 개울을 비판하고 배척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있어서도 안 되지만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비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바다가 강을 받아들이고 강이 개울을 받아들이듯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교회에, 믿음이 약한 자를 받되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을 보면, 믿음이 강한 자로 자처하면서 믿음이 약한 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강함과 약함이 음식에서 판가름 난다는 사실이 구차스러워 보일 수 있겠으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지켜야 할 계명의 층이 얇아지기 때문일 겁니다. 마침내 모든 계명의 껍질이 찢어져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면, 그때 비로소 믿음은 완성됩니다. 3~4절 : 먹는 자가 안 먹는 자를 업신여기든 안 먹는 자가 먹는 자를 비난하든, 둘 다 지금 건방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모든 믿는 사람을, 그의 믿음이 자기보다 강하든지 약하든지 간에 자기와 똑같이 ‘주인이 있는 존귀한 몸’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가 자기하고 믿음의 깊이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비난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5~6절 : 안식일이나 금식일을 다른 날보다 거룩히 여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날을 다 같은 날로 여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있으니 너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은, 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주를 위하여’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느냐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도 남이 바깥에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7~9절 :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삶과 죽음을 그리스도께 내어준 사람입니다. 내가 나의 땅과 건물을 어느 교회에 기증했다면, 그날부터 나에게 땅과 건물은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 합니다. 기증한 뒤에도 여전히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증한 게 아니라 우롱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쳐 주장한 ‘내’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없는 사람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남을 심판할 수도 없고 남한테서 심판받을 수도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10~12절 : 내가 내 눈의 건강을 진단할 수는 있지만, 내 코가 내 눈을 진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형제(자매)인 그리스도인을 판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토록 자명한 원리를 모르고 어째서 우리는 형제(자매)를 판단하고 업신여기고 비난하는 일로 아까운 세월을 보내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주신 12월, 주님 오심을 대망하는 12월,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이하는 12월을, 서로 보듬어주고, 믿어주고, 인정해주고, 기다려주는 귀하고 아름다운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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