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도신경 공부 ⑦ <교회, 그리고 속죄함> 에베소4:1~6 행전2:42~47 고후5:14~19
어린 시절 추억 속의 교회는 놀이터이자 푸근한 집이었습니다. 언제나 따뜻한 웃음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던 어른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한없이 착한 분들, 교회당을 정말 아버지의 집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던 어른들의 모습은 어린 제게 참 좋은 느낌을 주었고, 그분들의 거룩한 모습은 지금도 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가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그분들 속에 무엇이 있었기에 그토록 넉넉하고 자유롭고 평안했던가.’ 예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힘주어 고백합니다. 함께 외쳐보실까요? “나는,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교회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거쳐온 교회들 중에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과 다툼과 속임수와 위협과 온갖 더러운 냄새가 나는 겉치레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본인들이야 아니라고 우기지만, 사회의 지탄을 받는 목회자와 신도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 거룩함에 대한 열정, 그것이 과연 지금의 교회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딱 두 교회만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와 인간의 교회입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인간의 교회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보다 앞서간 교우들과 지난날 여러분의 모습이 초라하다고 느껴지나요? 아니지요! 가진 것은 얼마 없었어도 참으로 거룩한 모습이었습니다. 요즘 “교회 성장, 교회 성장” 하는데, 우리가 정말 성장시키고 되찾아야 할 모습은 교우들의 거룩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증거궤 앞의 휘장 밖에 켜두는 등불이 꺼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출27:20~21), ‘거룩함에 대한 열정’은 한 순간도 포기할 수 없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의 길은 보탬의 길이 아니라 덜어냄의 길입니다. 자꾸자꾸 덜어내 가난해지고 소박해지고 하나에 가까워질 때,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빛을 발하게 됩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처럼,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 교회는 비로소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하나의 소명이다. 부족한 부분은 서로 채워주고 진리의 숫돌이 되어 서로의 군더더기를 깎아내라.”는 본회퍼 목사님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는 교제이어야 합니다.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살벌한 구호가 우리의 의식을 옭아매는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은 모순투성이인 지금의 교회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사십 오년 전, 교회 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좋았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문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계신 것은 아닌지 두려울 뿐입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지향하는 공동체로서, 상처 입은 사람들을 감싸 안는 품으로, 사랑과 이해와 조화로운 삶의 모델로,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싸움에 동참하는 용사로 날마다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습니다.”
첫 번째 주제가 ‘교회’였다면, 이제 두 번째 주제인 ‘속죄함’ 즉 ‘죄를 용서 받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죄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입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유혹을 이겨낼 힘이 우리에게는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이내 후회하며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유혹을 받으면 속절없이 또 넘어가고 맙니다. 죄인이라는 단어에는 우리의 감정을 거스르는 뭔가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든 사람들 앞에서든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실상을 보는 자만이 자신이 죄인임을 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남의 허물을 보려고만 하지 자신의 허물은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정작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아파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에 이끌리는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은 인정하지만 나의 죄만큼은 한사코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는 사랑하지만 가까이 있는,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력하게 할 만한 죄는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죄가 가볍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죄는 무겁습니다. 세상에서 저질러진 모든 죄는 하나님에게 저지른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나와 관련되어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에게 저지르는 잘못도, 피조물에게 저지르는 잘못도, 가족이나 자기 자신에게 저지르는 잘못도 다 하나님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됩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죄의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는 배상이나 보상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몸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린 용서의 문은, 들어서는 이에게만 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고뇌 속으로 들어오시고, 우리 죄의 짐을 떠맡으시고, 그것을 제거해 주십니다. 다 같이 외쳐보겠습니다. “죄 용서 받는 것을 믿습니다.” 이 고백은 과거에 매였던 삶이 해방되어 새로운 미래를 향하게 합니다. 하지만 고뇌와 아픔과 자각과 자신을 바로 들여다보는 태도가 없는 용서는 용서가 아닙니다. 어째서요? 용서하는 이는 있을지 몰라도 용서 받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말이 좀 어려워졌는데, 비유로 다시 말합니다. 사람들은 죄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똑같은 죄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교회를 자동세탁기에 비유한 어느 시인의 표현은 아프지만 우리의 모습을 꿰뚫고 있습니다. 더럽혀진 몸과 마음을 던져 넣기만 하면 깨끗하게 빨아주는 곳, 교회가 정말 그런 곳입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용서 받기 위해 우리가 지불할 대가는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죄로 얽힌 모든 관계를 풀어내기 위한 치열한 노력 없이는 죄 용서 받은 자의 행복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용서는 값없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얽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도 가야 하지만, 죄의 현장으로 돌아가 형제의 용서를 구해야 함을 아는 자는 어디 있습니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용서하기 위해 마음을 여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교회란, 거룩한 백성이 모이는 집이요,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곳입니다. 그 안에 겸손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과 용납과 성령의 역사와 기도와 나눔과 찬송과 구원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죄 용서 받는 곳이요, 더불어 서로 용서하는 곳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