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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공부 ④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누가복음 23:13~25
오늘은 사도신경 공부 네 번째 시간으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부분을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동정녀 탄생에서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이,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 ‘가현설’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부인했습니다. 가현설이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지 않았고 유령과도 같이, 단지 환영만을 가졌다고 가르치는 이단 사상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도 믿을 수 없지만,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모두를 송두리째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 기독교 신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생애를 생략하면서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로마시대의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사형 틀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500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때는 주로 전쟁터에서 적군 포로를 처형시키는데 사용했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한꺼번에 3천명의 포로를 십자가에 처형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처형은 적군을 위협하는 끔찍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십자가형을 당하셨을까요? 로마는 법치국가였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아무렇게나 처형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두 가지였습니다. ‘신성모독죄’라는 종교적인 죄목과 ‘유대의 왕’이 되려 했다는 정치적인 죄목이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그 하수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적인 죄목만으로는 죽일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소하여 당시 유대지역을 다스린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종교적인 죄목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죄목으로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에 예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셨고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에게는 사형시킬 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라고 외쳐대는 유대인들의 폭동이 두려워 예수님을 성난 무리들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빌라도가 왜 그랬을까요? 총독의 힘으로 예수님을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만큼 정치적 생명이 짧아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살려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요? 예수님과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씻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왠지 이 이름에는 비극의 냄새가 납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주었던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유와 생명의 새 몸을 입었지만, 이 불행한 사람은 지금도 사도신경에 고정된 채 많은 사람들의 저주를 받습니다. 로마제국의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 그는 예수사건과 연루됨으로써 역사상 가장 불행한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좀 달리 해보겠습니다. 사도신경에 고정된 빌라도는, 2천 년 전 유대 땅을 지배했던 그 사람만이 아닙니다. 빌라도는 우리 속에도 있습니다. 진리보다, 정치적인 안정과 세속적인 출세에 연연하는 사람은 모두 이 시대의 또 다른 빌라도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 18:37~38을 읽는다.) 빌라도! 위대한 진리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진리란 무엇이냐고 묻기만 할뿐, 그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뒷걸음질쳐버리는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그 진리를 온전히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1:3) 했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으려는 사랑은 아직 사랑이 아닙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소망은 참 소망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고백과 실천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고백 없는 실천은 무미건조하고, 실천 없는 고백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처럼 사도신경 속에 못 박혀 있습니다. 빌라도의 외면과 유대인들의 아우성 속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거기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고 싶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죽음이 목표인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삶의 목표가 아니라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가지 않으려 하셨지만,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맺어진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무력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침묵합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기도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력해보이나 강합니다. 무력한 예수님, 완전히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를 어김없이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죄와 허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 오르십니다. 우리 때문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그림자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고백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의 허물과 죄를 대신해 죽은 예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들을 희생시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죄 때문임을 믿고 감격할 수 있는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됩니다.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 배신의 죄로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엎드리게 하옵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시어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님이시여,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후로는 주님을 닮게 하시고, 주님을 닮지 않고서는 우리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주님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사랑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