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9-11-30 (토)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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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도문 공부 2 ”

주기도문 공부②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계 4:8~11

오늘은 주기도문 공부 두 번째 시간으로 ‘이름’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름은 곧 그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리운 추억, 아련한 향수, 또 잊고 싶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의 시작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이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이름을 떠올리다 보면 왠지 외로워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외로운가봅니다. 그런데, 외로울 때 무엇을 하시나요? 외로울 때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때로는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찾아봅니다. 그 중에서도 로마서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의 ‘설 땅’ 노릇을 해주었던 그리운 이름들을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하나씩 하나씩 떠올립니다. 뵈뵈, 브리스가, 아굴라, 에배네도, 마리아, 안드로니고, 유니아 등등 많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바울은 회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아내의 이름, 남편의 이름, 부모의 이름, 자식의 이름, 교우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김춘수의 ‘꽃’ 중에서

시인은 꽃조차도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물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 물체에 생명을 주고,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로 다가오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불러주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진실하게 부를 때에 비로소 우리는 따뜻하게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병원에서 약 타가라고 부르는 이름과, 남편이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과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배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도의 응답이다.)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 하고 부를 때에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울림이 우리 삶의 빛깔이 되고 신앙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기록하다가, (야훼;야웨-아도나이) 끝내는 그 발음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런 숭고한 경외심, 조심스러움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천시되고 있습니다. 문간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외면하면서 스스로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교회가 있고, 강도 만난 이웃들을 외면한 채 우리끼리만 드리는 예배가 있고, 하나님에 관해서라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처신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오만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천시되고 있습니다. 우릴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 내쫓는 것을 금지했던 제자들의, 그리고 우리의 편협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인간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오직 성공과 명예와 돈과 권력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삶을 부정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세상,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세상, 배고파 울 기운도 없는 아이들과 포식으로 숨을 헐떡거리는 아이들이 뒤섞인 세상, 거룩함과 야만스러움이 뒤섞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구하는 것은 기도의 문을 여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거룩하신 분을 향해 활짝 열려지지 않으면,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허공을 맴도는 시끄러운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 모세는 신발을 벗고 엎드렸습니다. 신발을 벗는 겸허함 속에 하나님은 꺼지지 않는 하늘의 불꽃을 심어주셨습니다. 흐르는 물에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의 일에 분주한 마음에는 하늘의 빛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 선 사람은 이사야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이사야6:5) 신학자 루돌프 오토의 말처럼 ‘거룩함’이란 두려움을 일으키는 신비인 동시에 매혹적인 신비입니다.(거룩의 양면성)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고통과 관계된 것입니다. 내 속이 폭폭 썩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어둠이 온 땅을 뒤덮고,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진 까닭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하늘의 몸부림이 아니었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한 희생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기도하는 사람은 새 생명을 낳기 위한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하는 자이며, 그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입니다. 비틀거리며 비명을 지르며 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 일어서는 사람, 하늘의 불꽃에 점화되어 함께 타오르는 사람,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온몸으로 세상과 맞서는 사람, 사람이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누가 뭐래도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온갖 불의에 맞서는 사람, 저마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려는 세상에서 뒤쳐진 이들을 기다려 주고 그들과 동행해 주는 이들이라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진실로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기도를 진실하게 바치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생각해 보는 질문들

1. 거룩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2. 사람의 이름과 그의 인격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3. 인간이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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