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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공부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20:12, 신5:16
오랜 병고에 시달리는 교우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늘 무겁습니다. 특히 회복되기 힘든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 또 노환으로, 난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이를 만나는 것은 오히려 고역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만나기를 미루어 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오래전에 서울 잠실지방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할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전도사님, 하나님하고 친하시지요? 하나님께 부탁해서 저 좀 빨리 데려가라고 해주세요. 왜 나같이 아무 쓸모없는 것을 그대로 두시는지 모르겠어요. 무엇보다도 자식들 보기에 민망해서 못 견디겠어요.” 하시는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들과 함께 그분을 병문안 했을 때의 일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곁에 서 있는 며느리는 어린아이 같은 어머니의 칭얼거림에 이미 익숙한 듯 표정이 없었습니다. 수년째 대소변을 받아내고, 까탈을 부리는 어머니를 돌보아 온 며느리의 얼굴에서는 이미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보기에 민망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분들에게 나는 과연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며느리에게 겨우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며느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권사님에게 말했습니다. “권사님, 하나님의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권사님은 지금 남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형편이지만, 자식들은 병든 어머니를 돌보아 드리면서 사람 사는 도리를 배우는 거예요. 모든 것을 쓸모를 가지고 판단하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게 복이 아니겠어요? 권사님의 병든 몸조차 아드님 며느님에게는 복이에요. 그러니 다시는 하나님께 떼쓰지 마세요.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세요.” 어쩌다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젊은 전도사의 입에서 나오기 어려운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성령께서 말씀하셨을 겁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당연한 듯싶지만 결코 쉽지 않은 요구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들과 더 이상 감정적으로 얽힐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부모님에 대해 자식들은 미묘한 이중감정에 시달립니다. 특히 결혼한 자녀일 경우 그 고충은 가중됩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많은 분들이 소외감을 토로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의 속도에 적응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자동차 세대의 정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고민과 감각을 잃어버리고, 쓸모와 테크놀로지에만 부응하려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서양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그러니까 1945년 이후에 태어나 성장한 이들을 잃어버린 세대라 일컬은 적이 있습니다. 자명해 보였던 가치관이 전쟁으로 다 무너지고 삶의 전망조차 불투명해 이리저리 떠돌던 세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잃어버린 세대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음을 봅니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고 나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눈을 떠 창밖을 내다보니 어제와는 다른 세계가 눈앞에 전개된다면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자기가 차지하던 자리가 비어있고, 자신의 부재(不在)를 스스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물러날 줄 아는 게 미덕 아니냐?”하는 소리를 젊은 세대로부터 거듭거듭 들을 수밖에 없다면 말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새삼스럽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계명 중 1~4계명은 하나님 공경에 대한 가르침이고, 5~10계명은 인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에 대한 가르침 중 첫 번째가 부모 공경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도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여러분, 복된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약속을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땅에서 네 생명이 끊어지리라.”가 아닙니까? 쉽게 말해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자식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효도는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전통윤리는 흔히 봉양(奉養)과 양지(養志-뜻을 받듦)를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효도는 부모를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부모는 자신을 딛고 앞을 향해 나가는 자식을 보고 싶어 합니다. 부모님의 자리를 내드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장하고 성숙하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림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효도일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이처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또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이것이 신앙의 출발이요 목표이자 진정한 하나님 공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닮은 부모들은 오늘도 이미 커버린 자녀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땐 왜 그리도 바빴는지, 그래서 네가 함께 하자고 조르는 작은 놀이들을 함께 할 만큼 여유도 시간도 없더구나. / 눈 깜짝할 새 쌓이는 빨랫감, 바느질 요리. 고사리 손으로 그림책을 펼치며 읽어달라고 할 때마다 난 언제나 “조금 있다가 하자.” 하고 말했었지. / 그새 세월은 너무도 빨리 흘렀구나. 내게 언제나 떼를 쓰던 조그만 아이는 이제 다 커버려 더 이상 내 곁에 머물러 있지도 조르지도 않는다. 자신의 소중한 비밀을 내게 털어놓지도 않는다. 그림책들은 치워져 있고 이젠 함께 할 놀이들도 없지. 잘 자라는 입맞춤을 할 기회도 없고, 기도를 들을 수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은 돌아오지 않을 과거 속에 묻혀버렸다. / 한때는 늘 바빴던 내 두 손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길고 시간을 보낼 만한 일도 많지 않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 네가 함께 놀아달라던 그 작은 놀이들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하나님을 공경하여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부모를 공경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또 후손들에게 물려줄 이유는 분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