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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공부⑧ <도둑질하지 말라> 에베소서 4:25~28, 신명기 5:19
미국 뉴욕에 가면 ‘라과디아’라는 공항이 있습니다. 뉴욕 시장을 지냈던 ‘라과디아’라는 분을 기념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분이 시장이 되기 전에는 법관이었는데, 판사 시절에 겪었던 일화가 있습니다. 1920년대, 미국이 극심한 경제공황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한 노인이 빵을 훔쳐 먹다가 잡혀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가 그를 재판하게 되었는데, 심리를 다 마친 후에 ‘라과디아’ 판사는 그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어 그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이 돈은 당신처럼 배고픈 사람들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다닐 때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지낸 데 대한 벌금이오.” 그리고 그는 자기 모자를 벗어서 재판장 서기에게 주며 방청석에 돌리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저 노인처럼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동안 잘 먹고 지낸 데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분이 있으면 이 모자에 벌금을 넣으십시오.” 그래서 즉석에서 47달러를 거두어 그 노인에게 주었고, 그 노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법정을 나갔다고 합니다. 우리사회에도 ‘라과디아’ 판사처럼 바른 판결로 존경받는 판사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과 지자체의 시장이나 군수도 이 ‘라과디아’ 판사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헤아려주는 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광야’입니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 우리는 그곳에서 방황합니다.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비리가 난무하는 애굽이 저만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열심히 걸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리걸음이 아니었나.’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정부든 국민이든, 단체든 개인이든, 수많은 이기주의를 보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진정한 가나안은 요원하기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자조적인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망령이 슬며시 우리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앞으로 가자니 막막하고, 되돌아가자니 아득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구름기둥, 불기둥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단 한 걸음이라도 우리가 내디뎌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의 소리를 다시 듣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원리와 원칙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이것을 오늘 우리의 광야 길을 위한 하늘의 가르침으로 삼아보겠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은 다양한 목적어를 가집니다. 사람(원래는 이 뜻), 물건, 학문, 마음, 영혼... 먼저 사람을 목적으로 취해보겠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 사람을 훔치는 일은 성서에서 실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형제간에 미움과 질투심 때문에 은 스무 개를 받고 요셉을 팔아넘겼던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창37:28). 존립의 위기에 처한 베냐민 지파가 살아남기 위해 실로의 춤추는 여자들을 유괴하는 이야기(삿21:21). 정권탈취를 염두에 두면서 백성의 마음을 훔치는 압살롬의 이야기(삼하15:6). 역사는 정녕 반복입니까? 야곱의 아들들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 그리고 압살롬은 우리시대에도 곳곳에 있으니까요. 인신매매, 유괴, 뇌물, 폭력... 우리는 이런 일에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나요? 쾌락에 중독된 음란한 시선이, 허영의 거리에서 뒹구는 규모 없는 생활이, 부당한 이득을 뿌리치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함이 이 죄악들의 어미가 아닙니까.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철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모두가 존귀합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강요받아서는 안 됩니다. 업신여김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강요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곧 사람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은 또한 물건을 목적으로 취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 이 말은 우리 모두의 욕심을 억압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눈과 귀를 잡아끄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것들의 유혹을 이겨낼 힘이 솔직히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라는 성서의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이 가난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도웁니까?” 이 말이 하나님 앞에서 통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오히려 우리의 욕망은 마치 메마른 건조기의 초원에서 조그만 물웅덩이를 독차지하는 코끼리만큼이나 큽니다. 제 배를 채우고는 그 웅덩이에서 목욕까지 하는 코끼리... 복면을 쓰고 남의 담장만 넘는 사람만 도둑이 아닙니다. 부당한 세금을 버젓이 걷어가는 정부, 노동자들의 몫을 가로채는 악덕 사업가, 집단이기주의를 일삼는 자들, 심지어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훔쳐가는 교회도 다 도둑입니다. 또한 자기만 예수를 믿고 복 받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사람도 도둑입니다. 왜 그렇지요? 결국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훔치기를 좋아하는 것일까요? 도둑이니까요! 성 어거스틴은 어린 시절 동네 악동들과 어울려 남의 배를 도둑질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배를 훔친 것은 훔친 물건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도둑질 자체가 좋아서였습니다.” 네, 우리는 도둑질을 좋아합니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습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사람은 모두 도둑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모순 아닙니까? 모순입니다. 하지만 진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았지만 또한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모순의 양극 사이에서 우리는 헤맵니다. 때로는 위대한 정신의 힘으로 욕망을 다스리지만, 때로는 강력한 욕망의 덫에 붙들려 꼼짝달싹 못하는 모순 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인정하고 말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온갖 유혹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밖에도 우리는 많은 것을 도둑질합니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마치 전과기록을 보는 듯해서 다 들춰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오늘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까닭은, 우리 모두를 전과자로 만들려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을 그 누구라도 우리가 소중히 여기기를 바라시는 것이고,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이고, 유혹을 이겨나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는 교회 안에서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결코 배고픈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사람을 소중히 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인 것입니다. 돈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이 무척 크지만 그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잠시 빌려 쓰는 돈을 우리가 잘 사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서로 다른 생각들이 부딪히는 소음과 갈등이 굉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잦은 부딪힘이 많은 교회와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나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 한 달, “도둑질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을 붙잡고 인생의 광야 길을 올바르게 건너가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