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9-08-24 (토)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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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계명 공부 6 ”

십계명 공부⑥ <마음을 다스리자> 창4:8~15, 출20:13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여기서 살인하지 말라는 근거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9장6절(구약 11쪽)과 민수기 35장33절(구약 257쪽)을 찾아 읽는다. 그런데 “살인하지 말라.”는 오늘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 계명을 어기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살인해본 적이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계명은 당시에 모든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사사로운 피의 보복을 금지하는 계명’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지른 엄청난 살상행위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이러저러한 자들은 반드시 죽일지라.”는 피비린내 나는 명령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본래 이 계명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히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공동체의 존속입니다. 적대적인 세력에 둘러싸여 섬처럼 외롭기 그지없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부의 결속을 깨는 어떠한 행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생명에 위해를 끼쳐서도 안 되고, 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사롭게 미움과 복수의 마음으로 남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이 여섯 번째 계명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실 때에,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로 듣습니다. ①생명을 돌보면서 살아야 한다. ②생명의 자연스런 흐름을 가로막지 말라.

첫 번째의 경우, 예수님은 살인뿐만 아니라 남에게 성을 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으로 간주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1~22(신약 6쪽)을 읽는다.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이 뿌리(本)라면 살인 행위는 가지(末)입니다. 정말 다스리고자 한다면 뿌리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손발이 아니라 마음을 단속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살인 금지를 폭넓게 설명하신 것은, ‘미움’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 살인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에서든 무관심에서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살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 저질러지는 살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컨대, 불량식품을 판다든가, 술에 취해 운전한다든가, 건물을 대충대충 짓는다든가, 환경 오염물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배출한다든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윤리적인 측면)

두 번째의 경우, 물론 ‘죽음도 자연’입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죽음’도 있습니다. 때가 되어 돌아가는 죽음은 슬프지만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죽임’입니다. 끊이지 않는 전쟁, 어떤 조직과 음모에 의한 암살, 법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처형, 우리사회에서 맹장수술보다 더 흔해진 낙태, 종종 거론되는 안락사...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의 죽임이든 죽임은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득이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부득이함을 가진 자들이 임의로 죽임을 조작하는 데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오늘날의 물질문명은 죽임의 문화를 정당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듯이, 가인의 후손 중에서 라멕 같은 살인자가 나와서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인의 문명은 자꾸자꾸 커져만 갑니다. 어떤 경우든 생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상적인 측면)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살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고의적인 살인’입니다. 고의적인 살인이란 상대방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 문화계에 조폭 영화들이 뜨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이 비뚤어지고 있습니다. 조직폭력배가 마치 의리 있고 돈과 명예를 누리는 사람처럼 우상시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의 상당수가 조직폭력배를 동경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일입니다. 폭력이 미화되다보니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우리사회에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살인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첫째로, 앞에서도 잠깐 말했듯이 ‘낙태’를 들 수 있습니다. 낙태는 임신부의 뱃속에 들어있는 태아를 낳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죽이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만연해 있는 우리나라, 안타깝지만 우리나라가 세계 낙태율 1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연간 200만 명의 어린 생명이 낙태로 죽습니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미국의 6배이고, 진주시 인구의 7배입니다. 물론 아직도 낙태에 관한 찬반 논쟁이 치열합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서 아무리 정당화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낙태도 여섯 번째 계명을 어기는 살인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부모가 원해서 생긴 생명이든 아니든, 생명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정법으로는 죄가 안 될지라도 하나님의 법으로는 분명히 죄가 됩니다.

두 번째로, ‘안락사’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이미 노령화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안락사의 문제입니다.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 그리고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나 그 가족은, 보다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사 한방이면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는데 끊어지지 않는 모진 목숨 때문에 자기도 고생하고 주변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것을 보면서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안락사를 찬성하는 입장이고, 종교계만 빼면 60%가 넘는 국민이 찬성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이 상대화된다거나 돈으로 환산된다면, 그것 또한 여섯 번째 계명을 범하는 살인죄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내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신앙적 관점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로, ‘자살’ 역시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안락사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면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인데, ‘오죽하면 제 스스로 목숨을 끊겠는가.’ 동정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법으로는 용납이 안 되는 죄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죄냐 무죄냐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지만 생명을 경시 여기는 마음은 분명히 죄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직접적인 죽임보다 더 사악하고, 지속적이고, 치명적인 죽임도 있습니다. 그것은 발전과 개발이라는 껍데기로 무장한 오늘의 ‘비뚤어진 물질문명’입니다. 우리시대의 문화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을 가로막고 비틉니다. 죽임의 사상과 생활방식이 생명의 본바탕을 흐려놓고, 환락의 문화가 사람들의 이성을 어지럽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이웃끼리 따뜻한 정을 주고받고 서로의 품이 되어주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죽임의 살풍경이 일상이 되고, 다른 피조물의 신음소리에 귀를 막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죽어가는 것들의 안타가운 몸짓에 눈을 감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가련한 피조물들아! 제발, 지배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일을 힘과 돈으로 풀려는 생각을 버리고, 혼자만 잘 살겠다는 생각도 버리고, 순리대로, 서로 도와주며, 함께 잘 살아라. 너희가 살 땅은 내가 내려와 살 땅이니라. 저녁이면 같이 산책도 하고, 바람의 노래도 듣고, 오순도순 얘기도 할 땅이란 말이다. 그러니 억울한 피를 흘려서 부정하게 만들지 말라!”

예수님은,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미움과 증오가 곧 살인의 근원이므로, 근본을 치료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미움을 치료하는 길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첩경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사회와 역사 속에 스며들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전쟁과 살상과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법과 통치가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매사에 살인하지 않는, 살생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삶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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