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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개역개정판)에는 ‘우리’라는 대명사가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로마서를 꾸준히 읽어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신학자인 존 스토트는 로마서 5장 첫 부분에 나타나는 대명사 변화에 주목합니다. 로마서는 1장 앞부분에서 주요 대명사가 ‘나’로 시작합니다(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그러다 타락한 이방세계를 설명하는 1장 후반부에서는 ‘그들’로 바뀝니다(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2장에서는 다시 ‘너’로 바뀌는데(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그러다가 4장 끝부분과 5장 첫 부분의 오늘 말씀에서는 주요 대명사가 ‘우리’로 바뀝니다. (나>>그들>>너>>우리)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이 단지 유대인만의 조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조상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롬4:17). 바울은 아브라함처럼 ‘우리’ 역시,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믿은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고 말합니다(롬4:24). 그는 그렇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상실한 기독교는 결코 올바른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기쁨은 나누어도 슬픔은 짐이 되니까 나눌 수 없다? 그럴듯하지만 아닙니다. 슬픔은 나누어도 기쁨은 자랑하는 게 되니까 나누면 안 된다? 역시 아닙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진정한 신앙공동체지요. 그렇게 하려면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다른 사람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어야합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망가지면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나의 배 아픔이 되고, 다른 사람의 슬픔으로 인해 오히려 아픈 나의 배가 낫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오늘 본문 1절의 핵심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화평을 누리자”라는 명령형, 또는 청유형으로 되어 있는데, 주석들을 보면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 새번역도 그렇게 해석합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 새번역).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막연한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화평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전에는 우리가 화평을 누렸어도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하나님 없는 화평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즉 로마황제가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베푸는 화평, 세금을 내는 자들에게 베푸는 화평이지요. 로마제국 시민들이 그런 화평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세금에 저항하는 이민족, 또 황제숭배를 해도 세금을 낼 수 없는 노예에게는 화평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가짜 화평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서를 통해 로마의 화평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화평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 화평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화평입니다. 민족을 차별하지 않는 화평, 빈부를 가리지 않는 화평, 자유로운 사람과 노예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화평이지요. 또 그런 화평이 이루어지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저런 구분이 없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민족, 성별, 빈부, 직업, 학벌, 지역차별 같은 이런 게 다 없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나와 모든 것이 다른 이들, 즉 아직 낯선 ‘그들’이 ‘우리’가 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예배용어를 사용합니다. 2절 앞부분을 보실까요?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은, 옛날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가지고 성전 제단으로 나아가는 예배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희생제물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믿음’은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는 불굴의 믿음이기도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뜻합니다.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굳게 서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누구이든지, 어디에 속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되는 일에 있어서 그 어떠한 차별이나 제한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화평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소망하고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으로 인해 즐거워할까요? 재산이 늘어나서, 진급을 해서, 잃었던 건강이 회복돼서, 자녀의 입학과 취업 등 계획한 일들이 다 잘 돼서.. 당연히, 충분히 즐거워할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모두 3절에서 걸립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여러분은 환난 중에도 정말 즐거워하십니까? 환난이란, 일이 잘 되지 않아 여기 저기 말썽이 생기고, 어려움을 당해 근심거리가 늘고, 외부의 압박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런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소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있습니다. 2절 후반부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즉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사람은, 무탈할 때는 물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지요?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략)
교우 여러분,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심지어 환난 가운데서도 말이지요. 이를 위해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시기 바랍니다. 들풀처럼 사라지고 말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 말입니다. 그 소망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처럼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넘치도록 부어졌고,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로마서 5장 1~5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