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9-06-08 (토)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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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

얼마 전 미국에 있는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안부를 묻다가 “자기도 한때는 목사가 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그렇지만 친한 친구가 목사가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친구가 이렇게 목사가 된 저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참으로 황송한 느낌이 들면서 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친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목사가 된 너는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느냐?...’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우리가정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신앙의 유산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정말이지 신앙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진리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시련 앞에서 믿음만큼 우리를 든든히 지켜주는 것도 없으며, 믿음만이 우리의 지친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준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둘째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제가 살아가는데 그 뿌리가 되어주셔서, 왜 살아야 하는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제가 가야 할 길을 일러주시고 그 본을 보여주신 분이며, 그것을 가로막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겨내신 분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저도 잘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위로하시며, 힘과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신앙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겠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교회가 싫어져서 교회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친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붙잡으셨고, 아무리 어려워도 이 세상의 희망은 교회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만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단체나 공동체가 있었던가요? 어떤 정당이 과연 영원하겠습니까? 견고한 이념으로 무장된 공산주의도 불과 백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뜻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물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세상의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님의 교회만이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들 수 있는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로마서 15장을 읽으면서 크게 찔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랑이라고 합니다. 저처럼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것과, 하나님 신앙을 갖게 된 것과, 교회를 자랑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서 말한 세 가지 것들이 사람들 앞에 자랑거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제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래, 살아있을 때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어깨를 으쓱거리며 “예, 하나님! 저는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어쩌구, 저쩌구.”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웃기는 모습입니까? 그런 저를 보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3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이러실 지도.

그렇습니다. 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바울이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첫째,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래서 이방인들도 성령으로 거룩하여져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가 바울이 그토록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이 생깁니다. 바울도 은혜를 받고 우리도 은혜를 받았는데, 왜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과 같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본문 1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만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말하기보다는 내 자랑만, 내 생각만, 내 경험만 늘어놓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한 그 일들(하나님의 역사)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본문 18절 하반절을 보면, 말과 행위로 일어났고, 표적과 기사의 힘으로 일어났고, 생명의 능력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럼 그 결과는요? 당시 복음 전파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지금의 유고연방 땅인 일루리곤까지 남김없이 두루두루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들고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는 뜻입니다. 주님 뜻이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쓰임 받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는 것이 바울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세상에 자랑할 것이 많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마땅한 일입니다.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자랑할 게 많은 것과 실제로 자랑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자랑할 게 많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고 자기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과,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신 것만을 감히 자랑하노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표적과 기적을 일으켰노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로 말미암아 역사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을 보면,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 복종시켰습니다.”하고 말하면서 기뻐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바울의 말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여러분, 무심코 하는 말에 진심이 담겨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주의 종은 언제나 “저는 아무 한 일이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저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디서 감히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스스로 우쭐거린단 말입니까? 바울도, 베드로도, 평생 공로패 한 장 받아보지 못한 사도들이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요즘 한국 개신교회의 무슨 단체장이라는 감투를 하나 얻어 쓰고, 자신이 마치 그리스도인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교우들을 미혹하고 선동하는 이가 있는데, 이런 그의 언행은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그런 허탄한 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사도들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언제나 바른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 로마서 15장 14~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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