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9-03-09 (토)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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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스스로 섰는가? ”

제 작년, 그러니까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인 2017년부터, 3.1 만세운동 100년을 맞는 2019년을 기대하며 2년을 걸어왔습니다. 그동안 영적자폐증에 걸린 한국교회가 활짝 열려질 것을 기대했고 그 영향으로 500이란 숫자가 주는 의미만큼 교회가 개혁되길 바랐으며, 그 결과로 2019년 한국교회가 통일운동에 앞장서서 100년 전 민족에게 진 빛을 되갚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당시 천도교의 막대한 자금과 정신적 지도력 덕분에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나선 것을 아는 까닭입니다. 이렇듯 과거의 역사는 기독교가 민족에게 큰 빚을 졌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은, 기독교계 최고가 되려했던 서울의 한 대형교회 목사에 의해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는 세계교회협의회를 부정했으며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함으로써 기독교를 어두운 종교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19년을 이끌 힘을 기독교로부터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남남갈등을 부추기며 거짓뉴스를 생산하는 진원지가 되었으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기독교는 신앙의 선배들의 업적을 그저 자랑하는 일로 분주합니다. 아마도 지금의 자신들의 못난 모습을 감추기 위해 그리 하는 듯싶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중요한 것은, ‘오늘도 종교개혁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3.1 운동을 기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평화, 독립의 정신이 우리시대에도 살아있기를 바라서입니다. 그런데 외세에 맹종한 채 그저 정치적인 이유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손에 든 태극기는 100년 전 자주와 독립을 열망하던 그날의 태극기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선 민족이 제 정신을 차려서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이 총칼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었기에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 같은 삶을 살 것이다.” 아직까지도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이 이 나라에 만연한 걸 보면, 일본 총독의 저주서린 망언이 실언은 아닌 것도 같습니다. 물론 그 시대의 독립과 이 시대의 독립은 그 의미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섰는가?’라는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야할 것입니다. 정치적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인 영역에서도 이 물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선열들이 그토록 간절히 외쳤던 자주와 독립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섰는가?’를 물으면 어떤 답을 할 수 있겠는지요. 좋은 집에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잘 살고 있는데, 왜 ‘독립’을 말 하냐고 불편해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아직 ‘스스로 서지’ 못했습니다. 분단체제하에서 남남갈등이 더없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지금 광화문 광장의 풍경은 가관입니다. 어떤 정당에 속했다는 사람들 수 백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험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고, 이들을 지지하며 찬송을 부르는 기독교인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100년 전 독립을 위한 항쟁에 있어서 이념과 종교와 계급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태극기를 흔들며 외쳐대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르면 모두 원수로 취급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3.1 운동 100년이 지난 지금 평화가 정착되어야 할 한반도에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습니다. ‘스스로 섰다고’ 착각하는 이들 탓에 하늘이 준 평화의 기운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이념공세를 퍼붓는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보면, 종이 된 줄을 모르고 스스로 자유하다 여겼던 바울 당시 유대인들을 그대로 빼닮았습니다. 자유 수호란 이름으로, 우리 역사의 일부였던 이념이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했고, 없는 자들을 너무 쉽게 사지로 내몰았으며, 종교의 이름으로 외세를 끌어들였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서 ‘스스로 섰는가?’, ‘자유로운가?’라는 예수님의 물음이 불편하다면 그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독립이 불가능할 것이라 믿으며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무뎌진 이스라엘 민족의 감각을 일깨우려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3.1절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민족의 혼이 깃든 3.1 독립선언을 하늘이 주신 말씀이라 믿고, 그 정신과 자주와 독립과 평화의 가치를 실현시킬 목적에서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의식도 옛날 유대인처럼 많이 무뎌졌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결과일 것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을 지배했던 제국이 로마였다면, 오늘 우리를 압도하는 실체는 자본주의니까요. 돈 말입니다 돈!

그렇다면 ‘스스로 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한 자유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3.1 정신으로 이 땅 한반도가 어떻게 독립되어야 하겠는지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민족의 분단체제는 남남갈등을 증폭시켜 3.1 정신을 훼손시켰습니다. 남북이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서로 양보해가며 노력해야 하는데도, 이념논쟁에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힘겹게 합니다. 자꾸 과거로만 돌아가려 합니다. 그래가지고서야 어찌 희망적인 미래를 내다볼 수 있으며, 후손에게 평화와 번영이라는 유산을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매단 사람들을 향해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을 모른다.’ 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시오. 여전히 종의 삶을 고집하는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말입니다.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지 않고,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다.’는 역사 속 ‘뜻의 존재’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 겁니다.

3.1 운동 100주년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반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만들어갈 때 기독교는 비로소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있습니다. 목에 걸린 십자가나 교회당 벽에 걸린 장식품으로서의 십자가가 아니라, 역사의 질곡에 휘둘린 종살이, 곧 70년 분단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십자가의 기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기운으로 기독교는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고요.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는 ‘거짓된 자유’를 신봉하며 진리를 죽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기미년의 참뜻이 살아 있다면, 2019년 기해년을 사는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언제 종 된 적이 있었느냐고 반문하며 분노하는 가엾은 동족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각오’, 곧 교회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100년 전 3월 초하루, 우리의 선열들은 그런 삶을 택했습니다. ‘스스로 서려고’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발길에 차인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미년 3.1 정신을 우리가 기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서려고’ 했던 그 때의 뜻을, 그 뜻이 우리에게 다시 십자가를 요구할지라도 2019년에 다시 이어 갑시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할 이유라 믿습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요한 8장 31~38절, 로마 9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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