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로 읽으면, 둘째 아들의 부정적인 측면이 크게 부각됩니다. 그는 사실상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유산의 처분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나 가능한데,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유산을 달라고 했고, 외국에 나가 허랑방탕한 일에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합니다. ‘허랑방탕’이란, 우리말 사전에 의하면 “언행이 허황되고 착실하지 못하며, 주색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하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단지 거짓말하고 주색에 빠진 정도가 아니라, ‘구원의 삶에 합당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아소토스/아소티아,unsaved). 탕자는 이방 땅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지가 됩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동족들을 볼 낯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더욱 이방인들을 의지하는데, 그에게 주어진 일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일이었고, 그 대가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쥐엄나무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로 쓰는 콩 모양의 식물이라고 합니다. 그나마도 흉년이 들어 구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제 탕자는 허랑방탕한 죄인일 뿐만 아니라, 돼지를 치는 부정한 자요, 게다가 살길이 막막한 몹시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생깁니다. 탕자가 스스로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의 교훈은,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스스로 회개하고 아버지(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18절,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탕자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하늘은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결단이지요? 탕자도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한편 오늘 말씀을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주인공을 탕자가 아닌 아버지로 보는 것이지요. 실제로 오늘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두 아들을 가진 ‘어떤 사람’ 곧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유 전반부엔 둘째 아들이 등장하고 첫째 아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또 후반부엔 첫째 아들이 등장하고 둘째 아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 두 아들을 연결하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아무리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아버지의 사랑이 없었다면, 탕자의 귀향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아무 감동도 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략)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을 완벽히 제공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따라서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는, 주인공 아버지를 통해 우리를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탕자를 돌아오게 한 원동력이 탕자의 의지라기보다,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외면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줍니다. 하지만 허랑방탕하게 지내다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 온 아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는 아버지는, 실제로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런 아들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 비유를 ‘화가 난 큰 아들의 비유’로 보면 어떨까요? 탕자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 첫째 아들을 주인공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25절 이후는 마치 사족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15장 앞부분의 <잃은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봐도,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찾은 사람이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이야기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비유 역시, 허랑방탕한 아들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온 집안이 잔치를 벌인다는 이야기로 끝나는 게 마땅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화가 난 형이 등장하고, 아버지가 그를 달래는 내용이 추가될 이유가 있었을까요? 여러분, 세 번째 입장은 바로 본문의 이 사족과 같이 비틀어 놓은 부분에서, 비유의 핵심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누가 15장에 나오는 세 비유가 모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양을 다시 찾아도 이웃과 함께 기뻐합니다. 또한 잃어버린 은전을 찾아도 마찬가지지요. 하물며 양보다 귀하고, 은전보다 귀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큰 잔치를 벌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탕자의 비유). 그래서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자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다며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당신께 나아온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벌일 때,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유 속의 큰 아들처럼 분노하고 있었지요.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않아서 죄인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진짜 죄인은 예수님께 나아간 세리와 죄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척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 사회의 많은 교회가 무엇을 진정으로 기뻐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 교우들이 성공하고, 잘 되고, 축복을 얻는 것? 네,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가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누가복음 15장 11b~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