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8-11-10 (토)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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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하여 사랑하라 ”

오늘은 성서일과 중, 서신과 복음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은 참으로 고귀하다 여겨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 대제사장이시면서 동시에 희생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 히브리서 9장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지성소란, 휘장에 의해 성소와 구분되어 있어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대제사장도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으로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속죄(구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있는 지성소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으시지만, 그보다 ‘더 크고 온전한’ 천상의 성막을 통해 천상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셨다는 말이지요. 요한의 계시록에도 하나님의 보좌 옆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어린양처럼 죽임을 당하셨지만 천상의 지성소에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던 이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모습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제사장들이 그래왔듯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당신의 피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제물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 사역의 위대함이 드러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강조합니다. 아무 흠이 없으시며, 제물이 되실 만한 이유가 없었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무고한 피를 흘리면서까지 우리에게 바라신 것은, 진정한 정결이었습니다. 진정한 정결함이란, 단순히 법률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 깨끗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렇다면 흠이 많고 죄가 많은 우리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그분이 가신 구원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음을 잊지 않는 것이고. 둘째,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저마다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이고. 셋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니, 우리 또한 그분을 사랑하고 서로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지켜나가기 위해 그리스도 이전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 계명(율법)인데, 오늘 마가복음에서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섬기는 신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지 않는 종교 역시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른 종교의 사랑과 어떻게 다를까요? 제사(예배)보다 사랑이 우선이라는 뜻은 또 무엇일까요? 이 질문을 마음에 두고 오늘 본문 마가복음 12장의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유대교를 대표하는 서기관과 기독교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모든 계명(율법) 가운데서 으뜸은 무엇인가?’입니다. 진지하고 애정이 넘치는 토론이 이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일치된 결론에 이릅니다. 구약에서 따로 표시돼 있는 두 계명이 ‘사랑하라’는 명령어를 매개로 하나로 결합되고, 가장 위대한 계명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생각,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생각 없이, 멍한 상태에서, 건성으로, 아무렇게나, 버릇을 따라서 하지 않도록 순간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정성을 다해 먹되 그 밥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지금 밥을 먹고 있는 게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먹고, 사람을 만날 때에는 진지하게 만나되 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지금 그를 만나고 있는 게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만나고, 길을 걸어갈 때는 반듯하게 걷되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지금 걷고 있는 게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걷고... 모든 일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무슨 특별한 행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요, 이웃 사랑이 나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팎에 계시고 이웃은 우리의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고 이어서 남을 사랑하라는 얘기지요. 하지만 간단해 보이는 이 순서를 지키는 게 쉽지 않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계명(율법)입니다. 그러면 계명이란 무엇일까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계명은 알의 껍데기와 같은 것입니다. 알은 곧 생명이지요?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껍데기로 보호해 주어야 하지요... 그러나 때가 되면 껍데기는 깨져야 합니다. 여러분, 계명이란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럼 사람에게는 그 때가 언제일까요?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다는 생각,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스스로 깨닫는 때가 그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줄을 아직 모르고 자기가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병아리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껍데기의 보호가 필요하듯이,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계명을 알지만 충분히 지키고 있지 못하니, 본문 34절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두고 초대교회(마가의 공동체) 안의 갈등이 봉합되고 타협점을 찾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간 역사이고,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슬퍼하는 사람의 그 슬픔을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을 품어서, 어줍지 않은 언행으로 그들의 눈물을 닦으려 하기보다는 우리 또한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의 그 기쁨에 아첨하기보다는 내 일처럼 여기며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 가난하여 배고픈 사람,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 이들을 긍휼히 여기며 우리 또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늘 마음을 다하여 서로 사랑합시다.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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