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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본문은,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라고 비하하신,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좀 더 넓게 본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가복음 7장 전체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7:1~23까지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십니다. 그리고 그 논쟁의 주제는 ‘무엇이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가?’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외적인 것들, 음식, 율법 준수의 여부, 혈통과 같은 것들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한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또는 지킬 수 있는 형편과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적인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이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마가복음 7:21~23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기준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무리 외적으로 율법을 잘 지켜도, 율법이 정하는 정결한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혈통으로 유대인이라도, 그 마음에 악독이 가득하다면, 그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 마음이 깨끗하다면, 그 사람은 정결한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새롭게 제시하는 정결함의 기준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부정하다고 정죄한 이방인도, 세리와 나병환자들도 마음만 정결하다면 얼마든지 ‘정결한 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7장의 초반부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정해놓은 정함과 부정함의 경계를 허물어버리셨지요.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직접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정한 정함과 부정함의 경계를 무너뜨리십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두로’라고 하는 도시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본문이 전하는 상황을 보니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피곤하셨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신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를 정확히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병을 치유하시고 말씀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고된 일정으로 인해서 기진맥진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은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였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떠나 좀 쉬고 싶으셨고, 자신이 두로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좀 몰랐으면 하셨습니다. 그런데 24절 말씀은 동시에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고 전합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두로까지도 예수님의 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과 부정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예수님께 처음으로 찾아온 사람은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딸이 귀신에 들려서 큰 고통을 겪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 딸을 고쳐주시길 아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인간이신지라 피곤하셨고, 잠시만이라도 홀로 있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간절함 마음으로 찾아온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뭇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7절) 그런데 이 여인은 아주 재치 있고 끈질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인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28절)
여인은 예수께서 속담을 통해 이방인인 자신을 ‘개’라고 비유하자 그것을 재치 있게 되받아칩니다.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여인은 이 짧은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개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부스러기만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이 주시는 부스러기만한 은혜로도 내 딸이 나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내 딸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나에게 말대꾸를 하느냐?”라고 화를 내시지 않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29절에서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네 딸이 나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 “이 말을 하였으니”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번역을 보니까 공동번역에서는 “이 말을 하였으니”를 “네가 옳은 말을 하였다.”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옳은 말을 하였도다.”라는 대답을 통해서 이 이방여인이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선포해온 복음에 대해서 더욱 깊게 이해하고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보여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이미 그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몸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쳐 놓은 담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에게 은혜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모든 경계를 넘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담을 허물어버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담을 허무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주변에 둘러 쳐 놓은 담을 허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자꾸만 부와 가난, 학벌, 지역출신과 같은 담장으로 가두려 할 때, 그 담장을 거부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세상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려는 악한 마음에 맞서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아주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준과는 다르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심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는 내 주변의 사람들 또한 있는 그대로 사랑하심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세상의 모든 담을 허무시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걸어가야 할 삶의 길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넓고 크신 사랑에 날마다 붙들려서 우리가 세워 놓은 막힌 담들을 하나하나 허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 - 지난 주일 설교 중에서 (마가복음 7장 24~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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