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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지 않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두고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공통분모는 고향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고향이 같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서로 형이니 아우니 하며 갑자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명절 때마다 매스컴에서 고향 가는 길의 어려움을 요란하게 보도해도, 하루가 걸리든 밤을 길에서 지새우든 상관없이, 기필코 가고자 하는 곳은 바로 고향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에게 이처럼 어머니의 숨결 같은 아늑함으로 다가오는 고향이, 예수님에게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요? 복음서의 기록들은 모두, 예수님의 고향이 예수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방문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마중을 나와 반겨주는 가족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회당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우선 놀라움이었습니다. (2절) 그러나 이 놀라움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다음 이야기에서 드러납니다. ‘이 사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3절) 이는 매우 경멸하는 말입니다. 또 ‘목수’라는 직업을 강조해서 드러냅니다. 고향 사람들은 기껏 나무나 주무르던 천한 수공업자 예수가 지금 큰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지금의 예수가 아니라 ‘과거의 예수’를 되짚는데 온통 쏠려있습니다. 게다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족들까지 들춰냄으로써 예수님의 권위를 깎아내립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당한 것일까요? 사람이 보통 가질 수 있는 마음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치사한 감정이, 바로 남이 잘 되기를 꺼리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보통 시기심이라 부르는데, 이 같은 감정은 남이 잘 될수록 나의 모습을 더욱 초라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합니다.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마음 편히 바라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 뒤틀어진 감정은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의 모습에 상처를 내어서 나와의 간격을 어떻게든 좁혀보려고 애를 씁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의 못된 시기심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방문, 고향 사람들이 극심하게 배척했던 것도 바로 이런 못된 시기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은 그 후 2천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습니다. 예로부터 이웃(남)이 잘 되는 것을 너그럽게 받아주지 못하는 속 좁은 마음들이 많은 불행과 재앙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공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외적의 침입이나 천재지변보다는 내부의 시기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자랑할 만한 하스몬 왕조도 결국 형제들 사이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로마 군대에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형제의 잘 됨은 곧 나의 뒤쳐짐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잘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일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 대신 해주었다면, 비방하고 비아냥거리기보다 오히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주기를 바랍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이를 위한 존재’라면 교회도 역시 ‘다른 이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크지 않은 교회 안에서도 나뉨과 반목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어, 나만 챙기려 하는 비뚤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모습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가 남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자신과 남의 사정을 함께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특히 서로를 세워주는 것에서 삶의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맛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짜 축복입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마가복음 6장 1~6a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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