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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또 어떻게 기도하나요? 예배 때 공동기도로 만족하나요, 아니면 누군가(무언가)를 위해 날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나요? 오늘 말씀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만큼 극과 극으로 이해되고 오해되는 말이 있을까 싶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만능주의에 빠지고, 또 어떤 이들은 기도무용론에 빠집니다. 기도만능주의에는,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기도의 대가로 알려진 E. 바운즈의 <기도>라는 책을 보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한 성경구절이 가득합니다. 바운즈는 이를 근거로 기도는 언제나 응답받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며, 기도의 무한한 능력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만능주의에는 부작용이 따릅니다. 주변에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때에, 그게 다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고, 제대로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너무 쉽게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간절히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 당사자 마음이 괴로운데, 게다가 그의 기도가 절박한 취업의 문제일 수도 있고, 사활이 걸린 사업의 문제일 수도 있고, 또는 자신이나 가족의 질병과 관련된 매우 중대한 사안일 수 있는데, 기도가 게을러서 그렇다, 올바로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중 삼중으로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기도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힘들게 기도해서 겨우 얻을까 말까하는 것을 무신론자들은 너무 쉽게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위를 보면 예수 안 믿어도 대학 잘 가고, 취직도 잘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무병장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이웃 나라 일본이 잘 사는 게 무슨 예수 잘 믿고 기도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거냐? 그러면 할 말이 없지요. 어떤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심지어 인간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꿔나가려는 것은 무례하고 교만한 일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만능주의와 기도무용론 모두, 기도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기에 만능, 혹은 이룰 수 없기에 무용지물” 같이 기도의 초점을 자신의 뜻에 맞추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둘이 전혀 다른 것 같아도, 사실은 똑같이 기도에 대해 잘못된 관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신비한 마법지팡이나 쓸모없는 막대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입니다. 대화란 원래 사람이 서로 마주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신의 소원이 성취될 것 같으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말 안하고, 그게 무슨 대화고 무슨 기도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고, 그저 내 이야기만 합니다. 그것도 이것저것 해달라는 이야기만 하고 마칠 때가 대부분이지요.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의 기도만 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일방적으로 이런 일 저런 일들을 수도 없이 꺼내 놓고는 시간이 되면 다 돌아갑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고 자신의 얘기만 떠들다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말씀이 전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기도는 언제 해야 할까요? 기도는 항상 해야 합니다. (13절) 우리의 삶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고난과 기쁨이 항상 같이 따라다닙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은, 사실상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고난당할 때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즐거울 때 기도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만사가 잘 되는 것은 다 내 덕이기에, 굳이 하나님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걸까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힘들 때는 힘들어서 만나고, 기쁠 때는 기뻐서 만나는 사람이 진짜 친밀한 사람입니다. 힘들 때만 만나는 사람, 기쁠 때만 만나는 사람은 필요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지 친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어서 야고보서 기자는 고난 중에 특별히 병들었을 때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말해줍니다. (14절) 신앙인이라 해도 병들 수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 특히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병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인도 병에 걸리고, 병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병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다치거나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13장 20절에서, 온갖 기적을 행하고 죽은 사람까지 살려낸 선지자 엘리사가 죽습니다. 엘리사가 왜 죽었습니까? 죽을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왕하 13:14). 그러므로 신앙인이 병에 걸리는 것은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슨 죄를 지어서도 아니라, 사람이기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성도가 그렇게 병들어 힘이 들 때, 교회의 장로(목회자)들을 청하라 권면합니다. 의사를 부르라는 말이 없으니까, 교회에만 알리고 병원 가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도의 질병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한 질병이야 예외일 수 있지만, 입원을 하거나 수술이 필요한 중한 상황이라면, 반드시 교회 공동체에 알려야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교회가 그에게 신뢰를 주지 않았거나, 그가 교회를 진정한 공동체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집니다. 목회자도 중한 병에 걸릴 수 있고, 그 때도 똑같이 교회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질병의 원인을 죄 또는 죄로 인해 귀신 들린 것으로 설명합니다. 교우들에게 적용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정작 자신이 암에 걸리자, ‘사람들이 목사님이 무슨 중한 죄라도 지었나? 그로 인해 목사님이 귀신 들린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 비밀에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장로들은 투병 중인 교우를 찾아가서 무엇을 해야 하나요? 14절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는 것은 치료/의료행위라기보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간절히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이 말씀을 근거로 병자성사를 하지요. 병자성사의 핵심은 환자의 이마와 손바닥에 병자성유를 발라주는 데 있습니다. 역시 의료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이 환자에게 내리도록 기원하는 표시입니다. 개신교는 기름을 바르지 않지만, 병상에 있는 교우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어서 15절은 믿음의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15절) 믿음의 기도는 신실한 사람의 신실한 기도를 말합니다.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그를 천국으로 보낸다는 게 아니라, 그의 질병을 낫게 한다는 것입니다. 네, 믿음의 기도가 병든 사람을 낫게 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어떤 철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치유는 기도하는 자의 능력도 아니고, 기도 자체의 능력도 아닙니다. 15절 말씀대로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특별히 그때 환자에게 질병과 관련된 죄가 있을지라도 - 모든 병이 죄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는 개인의 과도한 욕망이나 시기, 질투, 걱정, 분노, 다툼 등으로 병이 생길 수 있음 - 그 때 공동체가 서로의 죄를 고백하며 기도한다면, 주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후략)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야고보서 5장 13~18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