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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금요일에 뜻하지 않은 장례식을 집례했습니다. 산청이 고향인, 서울에 사는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이 집례를 부탁해서 거절할 수 없었지요. 권사님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장례식을 맡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입니다. 산청경호장례식장, 이곳에서 차로 30분 조금 넘게 걸리는 곳입니다. 목요일에는 입관예식을 집례하고 유가족들과 입관 과정을 지켜보았고, 금요일에는 우리가 흔히 발인예배(예배가 아닙니다!)라 부르는 장례예식을 아침 일찍 집례한 후, 태풍으로 폭우가 내리는 날씨에 진흙에 발을 빠져가며 산에 올라 하관예식까지 마치고 나니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날씨에 집례를 부탁한 권사님은 크게 미안해했지만, 저는 손사래를 치며 목사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권사님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유가족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별로 없었지만, 95세 어머니 집사님을 보내드리는 장례예식을 통해서 그분들에게도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기를 바랐습니다. 집에 와서 보니, 구두와 양복바지는 온통 황토 범벅이었지만, 이번 장례식이 저에게도 적잖은 배움을 주었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유가족들이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좀 갖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면서 강조했던 것들이 새록새록 생각났습니다. “유가족 여러분, 우리가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 생명이 구원을 받게 한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아가 인생의 후반전인 영생을 누리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기게 하셔서, 우리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실 분도 하나님이시니, 앞서 가신 고인의 길을 따라 우리도 신실하게 살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이 아직도 가시질 않았는데, 이 마음을 갖고 오늘의 성서일과 욥기를 통해서 우리 또한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섬기는 것일까요?..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질문입니다.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즉 병이 낫기 위해! 경제적인 빈곤함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즉 부자가 되기 위해! 삶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즉 실존적인 이유를 위해!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해서, 즉 인간관계 확장을 위해!..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일까요? 만일 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사람의 온전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 1장 1절에 나와 있듯이, 욥은 하나님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욥을 자랑하십니다. “내 친구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처럼 정직하고 약속을 잘 지키며, 하나님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1:8 메시지성경)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많은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다복한 가정, 엄청난 재물, 평안한 삶으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욥은 하나님에게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을 자랑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사탄은 대뜸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있다고 강변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미 허락해 주신 자녀들과 소유물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만일 그것들을 모두 없애버리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1:11) 실제로 자녀들과 그 많던 소유물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온전함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욥이 건강을 잃으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사탄은 장담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욥은 변함이 없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욥이 어떤 모습으로 그의 온전함을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욥의 온전함은 우선 하나님께 대한 ‘제사’로 드러납니다. 욥은 자녀들의 생일잔치 후에 그들이 혹시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하여 자녀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또한 욥의 온전함은 슬픔 중에 ‘찬송’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자녀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온전함은 자신의 입술을 지킴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아내의 막말을 듣고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함’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바른 자세입니다. 만일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에 대한 온전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흠이 있는 제물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째서 흠이 있는 제물을 바치는 걸까요? 값싸기 때문입니다. 값싼 것을 투자해서 많은 복을 얻어낸다면 그만큼 내 것이 많아진다는 뜻이지요? 아니면 좋은 것은 미리 챙겨 놓은 다음, 남는 것을 갖고 제물을 바치려 하기 때문에 흠이 있는 제물이 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야 섬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먼저 계산을 끝내고 나야 손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의인이 틀림없지만 과연 욥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얘기했던 저의 장례식 설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유한하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이겠습니까? 우선 우리는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100년도 못 사는 인생들입니다. 수많은 질병과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손에 재물을 쥐어도 생명을 다한 뒤에는 아무도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권세요? 오래 갖고 있어야 10년이지요. 그런데 그 짧은 인생에만 모든 것을 걸고 살려 하니, 욕심을 내게 되고, 이기적으로 살게 되고, 오로지 돈 벌고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겁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어리석은 유한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입니다. 저는 장례식 때 유가족들이 이 진리를 깨우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몇 분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온전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욥기 2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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