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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분주한 사역 현장에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온 이야기입니다. 31절은 그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붙들어서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붙들어서’라는 말은 ‘범죄자를 체포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가족이 그를 ‘범죄자’보다는 ‘미친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미친 예수님을 붙잡아서 집으로 데려가려 했던 것이지요. 도대체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마가는 이와 관련하여 본문 중간에 소위 ‘바알세불 논쟁’ 이야기를 첨부했습니다. 거기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등장합니다. 서기관들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며 성경의 전문가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고수들이 모인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가 멀리 갈릴리 시골까지 내려왔습니다. 이는 변방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제 예루살렘 성경 전문가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평가받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지요. 당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현장에는,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날마다 귀신이 떠나가고, 열병 환자, 나병 환자, 중풍병 환자, 손 마른 자 등등 수많은 환자들이 치유되고, 죄인들이 죄 사함 받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미 갈릴리 지역의 서기관들을 통해 예루살렘 당국에 보고되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서기관들은 이 사건의 의미를 해석해야 했습니다. 단지 호기심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 사건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 사건인지 아닌지, 그들 나름의 권위 있는 해석을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단지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들려 생긴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기고, 죄인들과 어울렸다는 것이 그들에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안식일에 사람들을 치유하셨는지, 왜 소외된 사람들과 어울렸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가 아니라, 한마디로 귀신들린 미치광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가 귀신들려 미친 것 같다고, 누구보다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서 챙기지 않으면, 예수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협박인 셈이었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미쳤던지 그렇지 않았던지 상관없이, 일단 예수님을 붙잡아서 집에 데려가는 것이 예수님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무리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님께 이렇게 전했습니다. (32절) 이 모든 정황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던 예수님으로서는, 마땅히 멀리서 찾아온 가족을 기쁘게 맞이하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나라 사역을 계속해야 할 때이므로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고 가족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셨지요. 그 대답은 가족들에게 정말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었습니다. (33~35절) 이 이야기는 어쩌면 ‘밖에 있는 사람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 내 가족은 지금 나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바로 여러분이다.’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이 정말 사랑하는 가족을 거들떠보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먼저 할 일은 먼저 하고 나중에 할 일은 나중에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온 많은 무리를 먼저 돌보신 후에 예수님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셨을 것이고, 가족들은 예수님이 소문과는 달리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안심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 이후로도 가족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보십시오. 아들입니다.”라고 하시면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요19:26). 또한 동생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가장 신실한 일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예수님이 당신의 가족을 버리시거나 부정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새로운 가족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 가족은 혈육을 따라 맺어진 것도 아니고, 이익을 따라 만들어진 것도 아닌, 전혀 새로운 가족입니다. 그 가족을 우리가 옛 이스라엘 가족 공동체에 비유해 새 이스라엘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 새로운 하나님 나라 가족 공동체, 즉 새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오늘 말씀 바로 앞부분에서 그 기반이 되는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이 열두 제자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로 구성된 옛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새 이스라엘의 명확한 상징이었지요. 오늘날 사도적인 교회를 표방하는 세계의 모든 교회가 다 새 이스라엘 가족공동체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된 공동체에는 어떤 특별한 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정감일 수도 있고 정의롭고 윤리적일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경건함과 거룩함이거나 아니면 금식과 구제와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 갖추었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가 된 새로운 그리스도의 가족은 진정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라는 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그가 지금 밖에 있는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이든, 예수님과 함께 집 안에 있는 무리든, 그가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혹은 헬라인이든, 그가 종이든 자유인이든, 그가 남자든 여자든, 그가 노인이든 어린이이든..) 예수님의 참된 가족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에 유대교와 유대교를 대표하는 서기관들은 당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여,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그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즉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서기관 그룹에 있었던 바울, 그도 역시 처음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의 다른 서기관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온 세상에 전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처럼 오늘날 한국교회 앞에도 큰 시험이 놓여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과거 서기관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한국교회 안팎으로, ‘내가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내가 내린 결정이 하나님의 진리다. 자비와 긍휼과 사랑 없이 저것들을 다 정죄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외침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진실로 거기에 있을까요? 또한 최근에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뜻이 사랑보다 정의에 있는지, 혹은 정의보다 사랑에 있는지, 아니면 힘이 들어도 사랑과 정의를 함께 실천하는 데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시험을 받고 있지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관심을, 과거의 사실 여부에 두지 말고 오늘 여기에서 그대와 내가 만들어 가야 하는 진실한 삶의 실현에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마가복음 3:20~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