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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딸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거의 넋이 나가다시피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라는 사람이 오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그분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부디 자기와 함께 가서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는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라면 사회에서 존경받는 신분이고 누구에게 머리 숙일 일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은,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려고 하는 그의 애타는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인간이 감당해야 할 고통 중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심한 경우가 또 있겠습니까. 야이로의 간절함을 헤아리신 예수님이 그와 함께 길을 가는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바람에, 그들은 길가에서 잠시 멈춰 서게 됩니다. 한시가 급한 데, 회당장 야이로는 더 애가 타게 되었습니다. (마가의 본래 의도는 두 이야기를 통해 ‘믿음’에 대해 설명하려 한 것.) 예수님이 그 여인을 고쳐주고 나서 이제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그러니 이 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십시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이 말을 듣는 순간 회장당은 아마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비수 같은 말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말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요. 게다가 이 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말은 지금 자식을 잃은 부모 앞에서 할 말이 아닙니다. 그런 말투로 보아, 그들은 회당장의 집에서 보낸 하인이나 심부름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전혀 공손하지 않을뿐더러, 단순히 사실을 전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의 진행에서 그들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회당장으로 하여금 실낱같은 희망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 아이에게로 가는 예수님의 앞길을 막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아이는 그 당시에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빨리 오면 그 아이를 살릴 수도 있고, 우물쭈물하면 그 기회마저 놓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부정적이고 단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셔오는 것을 중도에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고, 살릴 수 있는 한 생명을 죽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딸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아버지가 과연 있을까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지금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두려운 사건 앞에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 마가복음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두려움이란 ‘믿음’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닥친 불행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저앉을 때, 그 불행에 가려 자칫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보고 거기서 희망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믿음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자신의 일을 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고 스스로 가는 길이면서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길,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길이고, 우리의 길 또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 하는 것이 상대방을 (또는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그분에게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이건 그분과 의논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겸손하게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을 일으켜 세워서 그의 집으로 함께 갔을 때, 거기에서 울며불며 통곡하면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 아이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아이에게로 가는 예수님을 막아서는 장애물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울고불고 하는 사이에, 아이가 죽은 것이 사실로 굳어져버리고, 그나마 아이를 살리려고 노력하던 사람들마저 실망하고 포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가식적인 슬픔은 금세 웃음으로 바뀔 수도 있는 가벼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반가워하기는커녕 예수님을 비웃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남의 불행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팔짱만 끼고 방관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은 못마땅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절망하고 포기하고 장례 준비를 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문제를 과장하거나 부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지만,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를 보십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하는 것을 봐서, 그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이 죽은 것처럼 창백한 모습을 하고 있었거나, 거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사경을 헤매다가 잠시 혼절한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 그 아이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림자를 실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림자를 그림자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달리다-쿰”하고 속삭이셨습니다. 그 말은 “소녀야(달리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마가의 주석) 일어나라(쿰).”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으니 예수님은 그저 자는 아이를 일으킨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인가요?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에게 가는 동안에도, 그 아이는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보았을 정도로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소녀가 일어나서 방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기적입니다. 물론 그 기적은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기적의 능력도, 크나큰 불행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볼 줄 아는 예수님의 눈이 없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림자를 그림자로 볼 수 있을까요? 서두르지 말고 날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는 것. 우리로 하여금 그 눈을 뜨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야이로의 어깨 너머로, 울며불며 통곡을 하는 사람들의 그 번잡함 너머로, 언뜻언뜻 비치는 그 행복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림들이 ‘아이가 죽었다.’고 할 때 ‘소녀야, 일어나거라.’하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타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야이로,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야이로가, 잠시 후에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야이로의 모습을 보셨고(=믿음), 그것이 희망이 되어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행복’입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마가복음 5장 21~24절, 35~43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