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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걸 이미 집작하셨을 예수님이 굳이 고향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닥칠 십자가 사건을 예감하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 찾아갔는지, 아니면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찾아가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문 6절에 의하면 아마도 복음을 전하러 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은, 그가 고향에서도 이미 랍비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향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방랑 설교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기 때문에 비록 고향 사람들이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하더라도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말입니다. 제 추측입니다... 어찌됐든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신들과 다를 게 별로 없어보이던 예수님이 지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배워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걸까요? 사람들은 대개 선생으로부터 이런 걸 배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랍비들에게 글자를 비롯해서 무언가를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배움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본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진리는 남에게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선생은 진리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단지 손가락으로 지시할 뿐이기 때문에 선생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진리 자체로부터만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진리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에게서만 궁극적인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목사에게서 무엇을 배우려 하고, 또 신학교 교수에게서 무엇을 배우려 하고, 유명한 부흥사에게서 무엇을 배우려 합니다. 물론 사람에게서 배울 게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아시겠습니까? 정작 진리를 배척하고 사람에게서만 배우려고 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본문(3절)에는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이유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멀리 있는 곳에 있는 사람이 뛰어난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기들과 함께 있는 사람이 뛰어난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깎아내리고 있는 내용들이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마가복음을 쓰신 분이 그것을 실제로 감안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내용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던 사람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반박하는 단서가 됩니다. 이제 그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따라가 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는 조금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마리아가 남자와의 관계없이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깊이 얘기하기 시작하면 너무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냥 간단히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던 인간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과 하나인가 하는 점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다른 생각들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에비온주의와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영지주의)입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이단으로 척결되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가현설은 그 시대 조류에 맞물려 아주 넓게 퍼져나갔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을 듣고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아마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즉시 동정녀라는 단어를 생각해 내겠지요.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인성보다는 오히려 신성을 강조하는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동정녀라는 단어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강조이기도 합니다. 성서를 비롯해서 모든 기독교의 교리는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에 대한 성서의 진술과 사도신경이라는 교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갈등이라는 삶의 자리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설명이 더 복잡해져서 간단하게 다시 말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곧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분명히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유대인의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갖고 있으며, 똑같이 숨 쉬고 먹고 마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우습게보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사실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를 경험합니다. 이 성육신의 신앙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지요. 그런 예수님이 고향을 찾았지만 배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그들에게서 결과적으로 거절당했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를 넘어서는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렇게 큰 역사적 흐름의 시작이 고향 사람들의 배척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오히려 예수님과 예수님의 뜻을 배척하고 우리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게 아닌지,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본문 마지막(6절)을, 보면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고향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이겠지요. 믿음이 없기는 고향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제자들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고 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채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보이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와는 달리,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만을 실상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보실까요, 아니면 없다고 보실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겠지요.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님의 권능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음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참 믿음이 있다면, 주님의 권능이, 즉 성령의 열매들이 우리에게서 열린다는 뜻일 것입니다.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마가복음 6장 1~6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