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8-08-11 (토) 16:06
ㆍ추천: 0  ㆍ조회: 37      
http://slowstep.org/home/?slowstep.1859.21
“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 ”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요한복음을 쓴 분의 해석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으니까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쓴 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 얘기합니다. 이런 낌새를 눈치 채신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셨고요(요6:15). 오늘 본문은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숨고 찾는 숨바꼭질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여러 번 허탕을 친 사람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서야 예수님을 찾아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25절) 그들은 지금 예수님이 자신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으로 생각하고 달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정곡을 찌릅니다. ‘언제’ 여기에 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 아니냐?”(26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너희들의 관심은 오로지 빵이 아니냐? 배부름이 아니냐? 나 예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냐?”하는 예수님의 추상같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이 땅에 사는 동안 먹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 누구도 굶주림 앞에서 의연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했듯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삶이란 무척이나 고달팠을 것입니다. 먹는 것 하나 변변치 못했던 그들에게, 이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야말로 천지개벽과 같은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줄 것 같은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요 왕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보다, 교회에 잘 다니면서 물질(육신)의 복을 받는 것이 우리의 최대관심사입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는데 있습니다. WTO, FTA로 대표되는 세계화도 역시 경제적으로 잘 사는 세계로 나가자는 의도지만, 많은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드는 허울뿐인 세계화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한,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에게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먹어야 산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빵을 찾아 나서는 것은 당연하며,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혼동입니다. 종교적인 차원과 경제적인 차원의 혼동입니다. 오병이어의 영적인 차원을 외면하고 무조건 배불리 먹는 것으로 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지적은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가 단지 자기들을 배부르게 하려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표적’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27a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두 가지 양식’을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썩어 없어질 양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입니까? 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이 양식은 내가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27b절) 영원한 생명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떡이요, 빵이요, 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권능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권능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을 쓰신 분은 바로 이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요한복음 6장 22~35절)

 

 

   
  0
3500
너희도 가려느냐?
교회생활은 대충대충 해도 가능하지만, 믿음생활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65)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와중에 예수님을 따라다녔...

 [2018/09/01 17:57]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
에베소서는 물론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 바울서신은 모두 후반부에 그리스도인의 실천윤리를 강조합니다. 바울서신의 특징인데, 서신서 앞부분에서 복음에 대한 설명을 집중적으로 하고, 뒷부분에서는 그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복음의 실천 윤리를 강조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서신의 윤리는 철저히 복음에 종속된 윤리입니다. 바울서신의 윤리를 넓게 말해 기독교 윤리라고 한다면, 기독...

 [2018/08/25 17:34]
주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것
1) 개인감정을 해소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집단 사이의 증오를 화해로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지역감정이란 문제가 있는데, 오랫동안 중요한 사회 문제였고 지금도 별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감정과 한 나라 안에서 지역 사이의 감정이 오래 지속되면서 심각한 사회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스포츠 경기를 통해서도 이 지역감정은 때로 폭력으로까지 번...

 [2018/08/18 17:39]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요한복음을 쓴 분의 해석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으니까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쓴 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 얘기합니다. 이런 낌새를 눈치 채신...

 [2018/08/11 16:06]
오병이어의 기적
이 사건은 신비로운 기적이나 그저 사람들끼리의 나눔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이 땅에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이루어내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알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역사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당시 사람들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나눔의 공동체이고 나눔은 그것 자체로 매우 좋은 것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아...

 [2018/08/04 20:50]
예수님과 보통 사람들
무척 피곤하셨던 것일까요? 본문 31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자고 말씀하십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에, 잠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좀 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한적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

 [2018/07/28 16:50]
세례자 요한의 죽음
요한은 이제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데, 정말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닥치는 슬픈 일, 괴로운 일, 답답한 일, 억울한 일, 말도 안 되는 일로 인해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지만, 그 현실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오늘도 하나님의 인...

 [2018/07/21 17:51]
고향과 예언자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걸 이미 집작하셨을 예수님이 굳이 고향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닥칠 십자가 사건을 예감하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 찾아갔는지, 아니면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찾아가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본문 6절에 의하면 아마도 복음을 전하러 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안식일을 맞...

 [2018/07/14 18:46]
보이지 않는 행복
죽어가는 딸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거의 넋이 나가다시피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라는 사람이 오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그분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부디 자기와 함께 가서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그는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라면 사회에서 존경받는 신분이고 누구에게 머리 숙일 일이 별...

 [2018/07/07 16:18]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믿음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보겠습니다. 같은 상황인데,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요? 깨어 있는 자와 잠든 자의 차이입니다. 단순히 잠든 사람은 평안하고 깨어 있는 사람은 무서운 게 아니라, 깨어 있어 평안하고 잠들어 있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그날 배에서, 모두 잠들었을 때 예수님만 혼자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풍랑을 만...

 [2018/06/30 16:40]
1,,,11121314151617181920,,,45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234번길 30 (사리 900-60). admin@slowstep.org / Copyright (c) SlowSte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