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나오는 목자상은, 부모와 같이 자상하고 헌신적인 목자상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시23:1~2)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언제나 행복하고 싶으시지요? 그렇다면 목자의 인도를 잘 받아야 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목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잃은 양의 비유를 들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했습니다. 주님은 양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목자이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뒤에 두고 찾아 나서며, 찾으면 기뻐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집도 직업도 없이 떠도는 갈릴리의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들을 받아들여 큰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 부릅니다. 여기서 ‘선한’(kalos)이라는 말은 ‘좋은’, 또 ‘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 당시, 겉만 번드레한 거짓 목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분은 그들을 도둑이요, 강도요, 또는 삯꾼이라 부르면서 선한 목자와 대조를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는 그들은 선한 목자와 잘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먼저,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줍니다. 양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를 따라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친밀한 관계는 목자의 사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이 또한 있어야 합니다. 어떤가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목자의 소리를 잘 알아듣는 양이었나요? 요한복음을 기록한 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바로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자부심을 간직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러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분은 어째서 이렇게 목자의 소리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선한 목자와 대조를 이루는 도둑이나 강도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이거나, 바리새파와 같은 유대주의자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기록한 분은, 이미 제도화되고 굳어져가던 초대교회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제도화 되면 될수록, 그 안에서는
교리라든지 의식이라든지 위계질서가 중요하게 되고, 개인이 예수님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예수님에 관한 교리 같은 것이 더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비교적 작은 공동체인 요한 공동체는, 밖으로는 유대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안으로는 제도화된 교회로부터 소외를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분은, 아무리 거짓 메시아들이 판을 쳐도 자신들은 절대로 속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목자를 겉모습만 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목자의 소리에는 관심도 없고 들을 수도 없지만, 자신들은 목자의 소리를 알아들을 만큼 목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 것이 좋을까요? 제도화되고 교리로 무장한 교회일까요, 아니면 요한의 공동체일까요?
다음으로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부정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도 십자가의 고난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메시아 상은 고난 받지 않는 메시아 상입니다. 그들은 양들을 위해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한 마리 잃은 양을 끝까지 찾는 예수님, 무리를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은 그 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여러분, 삯꾼은 목자인 척할 수는 있지만, 십자가의 고난만큼은 절대로 따라할 수도 흉내를 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그분의 고통과 슬픔을 싫어하거나 모른 척할 수 없을 것인데, 왜 우리는 자꾸만 그분의 영광만을 좋아하고, 사랑만을 구하고, 기쁨만 달라고 보채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건강한 양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그분 곁에 늘 머물러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요한복음 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