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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를 싸움이나 경쟁의 과정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극에 달한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말이 정말 절실하게 들립니다. 일종의 시장논리가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런 현실을 조건 없이 또는 적당하게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싸움에서 또 무한 경쟁에서 승리하고 싶으시지요? 오늘 읽은 성서 본문 중에서 한 구절이 이런 싸움의 승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 구절에는 두 가지 명제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인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긴다.’는 명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승리는 믿음’이라는 명제입니다. 이걸 줄이면,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좀 떨어진다고 느낄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늘 승리하지는 않습니다. 실패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믿음생활을 잘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승리다.’고 말입니다. 세상살이와 믿음생활을 분리해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가능한 대로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만 바라보려고, 즉 세상으로부터 수도원으로 도피함으로써 영적인 안식을 누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은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 이단이었던 영지주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영지주의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육체도 악합니다. 오직 하늘의 영원한 세계와 인간의 영만이 선합니다. 악한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 악한 육체에 관련된 일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와 그 육체로 살아가는 세상을 부정하고 오직 영의 세계에만 집중하라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이런 영지주의를 배격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부정하는 건 거짓말입니다(요일4:20). 요한만이 아니라 교부들로 대표되는 정통 기독교는 믿음생활을 핑계 삼아 세상을 등지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온갖 불의와 왜곡과 미움이 뒤섞여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왜 그렇지요? 세상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신앙으로 살려면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믿음이 승리한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이를 승리주의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승리주의는 매력적입니다. 평소에 점잖은 그리스도인도 팀을 갈라서 무슨 경기를 하면, 그 경기에서 이기려고 전력을 다 합니다. 승리에 대한 욕망은 그것이 선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남녀노소 그리고 진보냐 보수냐를 불문하고 아주 강렬합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기복주의 신앙도 따지고 보면 승리주의입니다. 기복주의 자체가 유치하기도 하고, 더 나가서 반기독교적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데 기울어지는 이유는 바로 승리주의의 매력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패배주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실업자가 되고 고생을 바가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살이 문제는 기독교신앙과 직접 관련되지 않습니다. 믿음생활을 잘해도 삶이 힘들어질 수 있고, 믿음생활을 시원치 않게 하거나 아예 신앙이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믿음이 좋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승리의 길이고, 승리는 바로 믿음에 있다.’는 본문의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본문 5절은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합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받아들이기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동의하기 어려운 교리였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까? 그 답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다음 구절인, 요일 5:11~12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굉장히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믿음이 승리의 길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런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승리에 대한 5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130억 년 전에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종말에 완성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놀라운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에 참여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참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이라 하더라도 이를 굳게 믿는 사람은 이미 그 부활을 맛본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은 우리를 내면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불이익을 받아도 크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십자가 처형과 같은 운명에 처해지는 어떤 사람도 절망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사실보다 우리를 더 강하게 해주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세상에서 우리는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논리에 길들여져서 이런 기독교의 진리를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문제를 제가 해결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설교자로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어느 한 순간 깜빡 잊었어도 다시 기억해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요한일서 5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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