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우에도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 16장의 마지막절과 17장의 첫 구절 사이에 13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이 있으니 말입니다. 창16:16이 전하는 대로라면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나을 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그런데 창17:1에서 아브람은 이미 99세의 노인입니다. 시나브로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아브람은 14살짜리 아들을 둔 99세의 노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기자는 16장의 마지막과 17장의 서두에 13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두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창세기 기자는 16장의 마지막과 17장의 시작에 아브람의 나이를 밝히고 있는 것일까요? 이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브람의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서 13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건너 뛴 것인가요, 아니면 특별히 관심을 끌만한 일이 생기지 않아서 무심코 건너 뛴 것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어떤 숨은 의도가 있기에 아브람의 나이를 굳이 밝히면서도, 13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에 대해서는 일부러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브람이 99세가 될 때까지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아브람이 86세에서 99세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창16장과 17장 사이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말없음’ 표!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삶을 묵묵히 지켜만 보고 계셨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13년이란 세월 동안 아브람이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은 어느덧 소년이 되었습니다. 이 13년 동안 아브람은 이스마엘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게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정실부인인 사래가 자식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창17:18)라고 솔직히 털어놓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사래가 낳은 아들이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브람의 적자(嫡子)인데, 이에 대한 약속은 아브람 편에서 볼 때 공염불이 된 지 오래였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창12:2)라고 약속하셨으니까, 그의 나이 75세 되던 해에 아브람은 진작 하나님께로부터 적자 탄생에 대한 언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래의 배가 불러오지 않자, 아브람은 차츰 그 약속을 반신반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한때나마 자기가 부리는 하인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으려고 작심하기도 했고(창15:2), 사래의 요청을 핑계 삼아 하갈을 품어 이스마엘을 얻기도 했습니다(창16:2,15). 그리고는 이스마엘이 태어나자, 그가 자라는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날마다 가슴 뿌듯하게 지켜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사래가 낳아 줄 자식에 대한 약속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기자가 16장과 17장의 연결에서 이 13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을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아브람의 세상살이에 대한 우회적인 고발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 이스마엘과 세상사는 재미에 빠져있는 아브람에게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람의 이런 세상살이를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그리 편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람과 약속을 걸고 언약까지 맺은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느 신이 인간과 언약을 맺어가면서까지, 당신의 약속이 틀림없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람의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은 세월이 흐르자 사래의 요청을 핑계 삼아 하갈의 몸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것입니다. 아브람은 어쩌면 자기가 10년, 2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사람의 인생 시간표에 맞춰 이루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기준에 맞춰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의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그를 찾아오십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 나타나셨다.’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실은 아브람의 짓거리를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불쑥 땅으로 내려오신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다짜고짜 이렇게 소리치십니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이 없이 살아라.”(표준새번역) 이 말씀은 분명 꾸짖음입니다. 아브람을 엄하게 나무라는 말씀입니다. 즉 아브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나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하라는 소리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처신하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흠없는 자, 완전한 자가 되라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행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주 못마땅하다는 지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아브라함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창세기 17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