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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폭력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폭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이 세상에 많은 열매를 곧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 길을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기보다 오히려 미워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원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기에, 중세 성화에 그려진 그분의 얼굴처럼 아무 감정도 없으셨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기쁘고 즐거우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에, 큰 괴로움과 두려움 속에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그 때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위기의 순간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한다고 상황이 달라질까요? 달라지기도 하고 달라지지 않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달라지지 않는 상황을 감당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나중에는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자기 부정이 없이는 도무지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길’이요, 우리가 감히 걷고자 하는 ‘영생의 길’입니다. 요즘 상생(相生)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띕니다. 그러나 만일 이 ‘상생’을 ‘너도 살고 나도 산다.’는 말로 쉽게 이해하면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자기 부정’이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죽음이 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법이요 사물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상생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는 길에 서지 않은 자의 입에서 주장되는 ‘상생’은 결국 ‘나는 결코 죽지 않겠다.’는 속셈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빈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 분명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그런 길입니다. 하지만 이 ‘자기 부정’을 내가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도 ‘그러나’라는 한마디 접속사로 당신의 ‘자기 부정’을 모두 하늘 아버지께 맡겨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은 아마도 어떻게 하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 즉 어떻게 하면 그들이 새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장 그들 몇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온 세상의 모든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 영광을 얻는 길’,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이뤄지는데, 오늘의 말씀은 그 때가 드디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어떻게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길이 열린다는 것일까요?
이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심판받고, 그로 인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이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비하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하기에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과연 어떤 자들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곧 일상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세상 속에서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로 인해 세상은 많은 열매를 맺고, 많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당신을 섬기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귀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과 같은 희생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남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그들이 심은 씨앗과 거둔 열매를 빼앗아 자신의 배를 채우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때 그런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나라의 지도자들을 세워 교회와 세상을 좌지우지하려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 죄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왜 선교가 안 되는지, 왜 교회가 비난 받는지, 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지,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큰 힘에는 반드시 큰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될 수 없습니다. ▣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요한 12:20~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