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8-03-30 (금)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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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나귀의 힘 ”

어떤 중요한 일로 어디를 급히 가야 하는데, 그만 기차나 버스를 놓쳐서 발을 동동 구르다 다음 차를 탔던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그런 일들의 연속인지 모릅니다. 무언가 늘 조금씩 뒤로 밀리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차를 놓쳐 다음 차를 타지 않았다면 저 사람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결혼도 하지 못했을 거라든가, 그때 길에서 문득 거길 찾아가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몰라, 하는 것들은 없습니까? 내 친구 중엔 전철을 타고 내릴 곳에서 내리지 못해 두 정거장을 더 가는 바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아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때 아빠가 깜빡 졸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친구네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에 온 사연이 그럴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다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만약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찌됐을까요? 이 사순절의 주인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고난의 길을 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또 어찌 됐을까요? 여전히 죄악의 굴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찾아온 고난주간에, 주님을 진정으로 감사하며 맞이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실험으로 극동아시아는 매우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북한,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초긴장상태였지요. 그런데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어 우리나라 이 한반도는 평화 무드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또 다른 전쟁이 촉발되었는데, 바로 미국이 주도하는 관세 보복, 무역 전쟁입니다. 이로 인해 이번에는 극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저 유럽까지 긴장과 갈등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극단적인 갈등과 긴장,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계는 여전히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불신과 배반의 역사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초강대국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는 발 빠르게 독제 체재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 무엇일까요? 바로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적 풍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과연 이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감당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라는 것은 나와 너의 차별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가라는 것인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또 아차 하는 순간에 자기가 더 잘났다고 남들과 자신을 구별하려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고 믿으며, 또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대접해야 만족해합니다. 쥐꼬리만한 힘을 가지려고 남을 밟고 서는 행동을 서슴지 않으며, 사랑한다, 좋아한다 하면서 사실은 지배하려 드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충고를 한다면서 억지로 가르치려 드는 일도 그렇고, 정죄하는 것을 정의로움으로 착각하는 일 역시 그렇습니다. 이 모두가 자기를 남보다 높은 자리에 세워놓고 인간사를 보려 드는 것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강자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는 이러한 강자의 논리를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 직전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대화(마가 10:35~45)도 그런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때가 이르면 자기들을 서로 좌우 최측근으로 삼아달라고 사전 인사 청탁을 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른바 눈도장사건이라 할 이 일을 알게 된 나머지 열 제자들이 한 결 같이 씩씩거립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른다. 그러나 너희들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마가 10:42) 인간을 사랑하는 일을 두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은 최대의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리십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라.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가 10:44~45) 이 섬김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섬김은 그저 남보다 더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가 흔히 섬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저 자신부터 얼마나 쉽게 하고 있는 것인지를 새삼 돌이키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이런 마음을 갖고 산다면 세상은 아마 훨씬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제자들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예수님 일행이 어린 나귀를 이 행차에 앞세운다는 것은, 백성의 기대를 만족시켜주는데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백성은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강력한 지도자(영웅)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꿔버릴 메시아를 원했지요. 그러나 결국,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선택한 어린 나귀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 이 땅의 교회는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전도사 시절에 이 말씀을 설교 본문으로 택한 적이 종종 있습니다. 당시 설교의 핵심은 ‘겸손과 깨달음’이었습니다. “모두가 약하다고 여기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나라를 향해 옮기는 일이로구나. 그러다가 넘어지고 깨지고 해도 괜찮다고 여기고 가는 일이로구나.” 하는 깨달음! “비록 힘이 부족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나귀처럼 경험이 없어도 오직 주의 뜻을 따르는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시작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하는 위안! 나에겐 큰 힘이 되었지요. 새끼 나귀를 탄 예수님의 모습이 사역의 모델이 되었고,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현실(교회 안에서까지)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가면서 강자의 지배 논리에 많이 부딪치며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나귀의 발걸음이란 뜻은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어렵기 짝이 없는 것이로구나.”하는 절박감을 수도 없이 느꼈습니다. 이렇게 어린 나귀의 모델은, 뜻은 높지만 힘은 없다는 자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귀를 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이건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믿음의 문제는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를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 결국 진정한 힘은 이 어린 나귀의 모습이구나.”하는 새로운 깨달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는 경험도 필요하고, 지혜도 자라야 하며, 힘도 길러져야 합니다. 사람들도 보다 많이 모여야 하고, 그 모인 사람들의 생각과 믿음이 하나가 되어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열정에 찬 믿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되짚어봐야 하는 모습은, 오직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뜻을 지고 가려는 ‘어린 나귀의 아름다움’입니다. 제 아무리 많은 경험과 제 아무리 기가 막힌 지혜와 제 아무리 대단한 통찰력이 있다 한들 정작 요구되고 필요한 것은, ‘아무런 사심 없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부르심에 순결하게 나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과 약속과 희망을 믿고, 서툴고 힘이 약해도, 때로 두려워도, 처음 먹었던 마음 그대로 하늘의 뜻을 그대로 지고가려는 자세만이 진정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힘인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하늘을 이고 가는 사람의 축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힘의 정체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고난을 이겨낼 능력입니다. 이 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힘이 승리한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이란, 이 확신을 흔드는 세상의 논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일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세상이 믿고 따르는 강자의 논리가, 사실은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한 점의 주저함도 없이 분명히 깨닫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강한 자들을 닮으려 할 때 도리어 무너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약한 자의 모습이 사실은 가장 강한 존재임’을 믿는다면, 그것은 곧 여러분에게 무한한 능력으로 임할 것입니다. 이웃이 진정한 이웃이 되며, 정의가 낮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꿈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름과 믿음으로 만난 여러분이 올바르게 살아감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하나님,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날개 아래 품으시어 보호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편안함에 취해서 주님의 고민과 순종과 십자가의 고통을 잊어버렸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지배하려고만 하였고, 위에 있는 것을 취하기보다는 땅에 있는 것들만 생각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옵소서. 올해도 어김없이 종려주일(고난주일)이 되었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의 한없는 자비를 우리도 배우게 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주님을 따름으로 생명의 부활에 이르게 하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지난주일 설교 중에서 (마가복음 11장 1~10절, 15장 16~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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