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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모세, 누가 먼저인가? (로마 4:9~25) - 로마서 묵상 14 의로운 짓을 한 바 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니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행복은 오직 ‘믿음’이라는 통로를 거쳐서 오는데, ‘행위 없는 행위’인 믿음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행복은 많은 유대인이 생각하고 있듯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그가 유대인이 되었다는 표시일 뿐입니다. 9~12절 : 뿌리(本)에서 가지(末)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거꾸로 가지에서 뿌리가 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고 그것을 확인하는 표로 받은 것이 할례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믿음보다 앞자리에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를 받았거나 받지 않았거나,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못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기에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유대인의 혈통과 할례를 비롯한 모든 전통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당시 유대교 정통 보수주의자들한테는 못마땅하고 역겹고 위험한 이단 사설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바울을 죽여 없애려고 한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13~14절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세상을 물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그가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그가 무슨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창17:3~4 참고) 이렇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뒤를 이어 그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창17:9~11 참고) 길게 말할 것 없습니다. “아브라함(믿음)과 모세(율법), 누가 더 먼저인가? 누가 누구한테서 나왔는가?” 이유가 어디에 있든, 이 순서를 뒤집어 앞뒤를 바꾸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율법에 메여 사는 못된 습관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알았으면 그 못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15절 : “큰 길(大道)이 무너져 인의(仁義)가 있고 나라가 어지러워 충신(忠臣)이 있다.”고 했습니다(老子18장). -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이 이미 그것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도 않는 짓을 금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 범법도 없다.”는 말은 법 없이 살 수 있어서 법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문제와 해결의 뿌리는 인의를 지키는 데 있지 않고 무너진 대도를 바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법을 잘 지키는 데 있지 않고 법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16절 : 첫 문장이 좀 까다롭습니다. 풀어서 그 뜻을 헤아리면 대강 이러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세상을 물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둘째, 그 약속 또한 인간의 ‘믿음’이 거둔 결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셋째, 은총으로 내리신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후손에게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장벽이 무너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거늘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별이 어찌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판단하고 쪼개는 사람이 아니라, 뒤로 물러서고 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7~25절 :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일흔다섯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도록 했고, 백 세에 아들을 낳도록 했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폐경 한지 이미 오래인 아내의 침실에 드는 늙은 아브라함, 이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하나 된 아브라함과 우리 사이에는 시공의 간격도 차이도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