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큰 사랑과 큰 고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11:15)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는 보기, 듣기, 눈멀지 않기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신다. 이 사실이 갈수록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나는 그것이 우리같이 보통 사람이 아닌, 마음이 완고하게 굳어지고 사악한 인간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할수록, 우리로 하여금 더 밝게 세상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개인들의 나쁜 의지가 아니라 눈먼 문화와 눈먼 제도임을 알게 되었다. 사랑과 기도와 고난의 여정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 한, 우리 또한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큰 사랑과 큰 고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싸움 아니면 도망, 이것 아니면 저것, 전부 아니면 전무의 차원에 의식이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낮은 수준의 두뇌활동인 이원론적 사고방식으로는 "신비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큰 것들'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무엇이 '큰 것들'인가? 사랑, 자유, 악, 하느님, 영원, 비폭력, 용서, 은총, 자비 같은 것들이다. 이뤈론적 사고의 틀로는 이것들을 담아낼 수 없다. 비(非)이원론적 사유로만 접근할 수 있는 역설과 모순이 그 안에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저 바깥에 있는 악당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 진지하고 좋은 뜻을 품고 게다가 사랑받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예수가 말씀하시는 눈멀고 귀먹은 상태로 몰아간다. 우리로 하여금 눈을 떠서 볼 것을 보게 하고 귀를 열어 들을 것을 듣게 하는 것은 큰 사랑과 큰 고난이다. 단조로운 신앙고백과 교회당의 예배만으로는 그런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 진실로 이 때문에 예수는 오늘의 복음에서, 사람들이 율법과 예언을 알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입은 저마다 "율법과 예언을 믿노라"고 했지만 그것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를 그들의 몸은 몰랐다. 예수가 여기에서 나쁜 악당들에게가 아니라 그냥 군중에게(마태11:7)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되묻기| - 나는 여전히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이 나를 사랑의 인간이 되도록 도와주는가? 과연 그것이 나를 복음에 더 충실하도록 도와주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