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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범죄 (로마 5:20~21) - 로마서 묵상 17 법(法)이 좋은 것인 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그 법을 지킬 수 없으니 딱한 일입니다. 나아가 천지 만물 가운데 홀로 인간만이 하나님의 법(명령)을 어길 수 있고 여태 어겨 왔으며 지금도 어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없다면 법을 어기는 일 또한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로마7:7b) 그러면 왜 법이 있게 되었을까요? 20절 :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법이 들어왔다는 설명입니다. 조심스레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죄를 짓게 하려고 법을 주셨다’는 말로 읽기 쉬운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부러 그런 악을 품으실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 같은 본문을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법이 생겨서 범죄가 늘어났다.”(공동번역)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들어왔습니다.”(표준새번역)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가톨릭성경) - 용어가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같은 내용입니다. 율법이 있게 되면서 인간의 범죄가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율법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은 죄를 짓게 되었다고 읽는다면 과연 제대로 읽는 것일까요? 아담이 범죄한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법(계명) 때문인가요? 법이 없다면 물론 범법도 없겠지만, 아담이 법을 어긴 것은 법 때문이 아닙니다. 하와 때문도 아니고 사탄의 유혹 때문도 아닙니다. 아담 스스로 그런 것에 ‘탓’을 돌리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핑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법 때문도 아니고 여자 때문도 아니고 사탄 때문도 아닙니다. 아담은 스스로 저지른 범죄의 ‘탓’을, 자기 밖의 그 누구한테서도 그 무엇에서도 찾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저지른 범죄의 씨앗이(범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에게 법(계명)이라는 옷을 입혀주신 ‘자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주신 것은, 그로 하여금 그것을 어겨 죄를 짓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16~17을 다 함께 읽는다.) 마음대로 실과를 먹으라는 것도 명(命)이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도 명(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명을 주시면서 아담이 그 명을 지키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명을 지키든 어기든 그것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일은 전적으로 ‘아담의 몫’입니다. 그는 각종 실과를 임의로 따서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도 있고 어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것은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빼앗거나 건드릴 수 없는 ‘절대 자유’였습니다. 좀 더 자세히 반복하여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계명’(법)이라는 포장지에 거룩한 ‘자유’를 싸서 선물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은 ‘계명’이라는 그릇에 담긴 ‘자유’라는 물이었습니다. 그릇을 깨뜨려 물을 쏟아버리듯이,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그분이 주신 자유를 스스로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자유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한 ‘절대 자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에게만 그것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축복은 저주의 다른 얼굴입니다. 화(禍), 복(福)은 둘이 아닙니다. 동일한 명(命)을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습니다. 아담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 영생을 누릴 수 있는데,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겨 죽음을 부른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자비(無限慈悲)는 그 불행을 더 큰 행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간의 배은망덕이 하나님의 사랑에 손상(損傷)을 입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범죄를 늘어나게 했다는 바울의 말은, 사람이 법 때문에 더 많은 죄를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법이 있어서 자신의 범죄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말로 새겨들어야 합니다. (로마 7:7을 다 함께 읽는다.) 탐내지 말라는 법이 있어서 탐심이 생긴 게 아닙니다. 탐내지 말라는 법이 있기 전에 이미 내 속에 탐심이 있었습니다. 법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내 속에 있는 탐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바야흐로 출구(出口) 없는 죄인임을 자각(自覺)할 때, 그리하여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할 때, 거기에 인간의 범죄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놓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21절 : 죄는 하나님의 명(법)을 어기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다른 누가 그를 죽이는 게 아니라 죄짓는 자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다는 말은, 죄 있는 곳에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의(義)로 왕 노릇 합니다. 의가 있는 곳에 영생(永生)이 있습니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분은 삶의 한순간도 하나님의 명(법)을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우리에게는 값없이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것을 받아들인 자에게만 은혜입니다. 밝은 대낮이 눈먼 자에게는 어둠이듯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는 예외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