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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하여 죽은 몸 (로마 6:1~9) - 로마서 묵상 18 인간의 죄가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둠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빛을 알 수 있을까요? - 그렇다면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하는 건가요? 1절 :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 틀림없이 탁상공론(卓上空論)을 즐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호사스러운 곳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며, 전쟁에 대하여, 굶주림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그들은 전쟁과 굶주림의 고통과는 아무 상관 없이 자신의 ‘말솜씨’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게도 이런 부류의 탁상공론이 이른바 학문(學文)이라는 이름으로 행세를 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하나님과 정직하게 만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장황한 토론을 펼치고 있습니까? 날마다 잘 차려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서 인류의 굶주림에 대해 그 대책을 따지는 자들과 은혜를 더 받으려면 더 많은 죄를 저질러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자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자기와 떼어 놓고서 봅니다. 그 결과, 불난 집에 들어앉아 ‘불’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는 어이없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탁상공론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었습니다. 바울의 시대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 더 많은 범죄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바울은 그것은 터무니없는 궤변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어둠과 씨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냥 가만히 불을 밝히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언제나 단순명료합니다. 장황하게 떠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놓고 또 누군가를 놓고, 말끝을 따라가면서 짓는 개가 되지 말고, 언제나 마음을 덮치는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2~3절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요?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각자 세례라는 의식을 통하여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물에 온몸을 담갔다가 꺼내는 세례 의식은, 그리스도 교회에 입문하는 사람이 반드시 밟아야 하는 절차였습니다. -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재현합니다. 사람은 물고기가 아니므로 물에 잠기면 죽습니다. 그렇게 죽었다가 물 밖으로 나와 부활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죄에 대하여 죽은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살리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만일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으셨다면, 당신의 육신은 십자가(죽음)를 면할 수 있었겠지만, 그로써 아버지의 뜻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뜻을 ‘살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어떻게 ‘더 많은 죄’에 거하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5절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따로 떨어진 두 사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두 얼굴입니다. 그러나 순서는 엄연히 죽음 뒤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죽음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다음에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부활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이 순서를 뒤집거나 바꾸면 안 됩니다! 6~9절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는 무엇을 아는 건가요? -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죽으리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죄가 우리를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되리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힘이 못 미치는 치외법권 지대에 들어섰습니다. 더 이상 죄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그런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알고 있습니까? 말과 생각으로만 아는 것은 아는 게 아닙니다. 온몸으로 알아야 합니다. 몸으로 나타나지 않은 지식은 오히려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는 전혀 별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