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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의인 (로마 4:1~8) - 로마서 묵상 13 1~3절 : 바울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밝힙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조상”(4:16)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당신의 책에 적어 넣으셨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것은, 그가 무슨 행위를 쌓아서 그 공로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아브라함에게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을까요?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하란을 떠나지 않았어도,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모리아산에 가지 않았어도,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을까요? 행위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약2:26). 따라서 ‘믿음’과 ‘행위’를 동떨어진 별개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행위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기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를 모두 침묵시키고(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하란을 떠났다면, 그것은 그냥 ‘행위’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께 복종했기 때문에,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헌금을 바치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어떻게 바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헌금을 보시지 않고 헌금 하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 까닭에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내가 주인이 되어 내가 하면 그것은 ‘행위’요,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내가 종이 되어서 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4~8절 : ‘일하는 자’는 누구고 ‘일한 것이 없는 자’는 누구인가요? 일한 것이 없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곧 일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일하는 사람’과 ‘일한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요? 비유하건대 머슴이 빗자루로 마당을 쓸었습니다. 이때 만일 빗자루에게 의식(意識)이 있어서, “내가 마당을 쓸었다”고 한다면 그 빗자루가 바로 ‘일하는 사람’이요, “마당을 쓴 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가 곧 ‘일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경건한 자를 경건하다 하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는 일이라면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의롭지 못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이기에 예외 없이 경건치 못하고 의롭지 못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 따라서 누구도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자기가 불의한 사람인데도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1:17)고 했습니다. 선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선물이 되는 법입니다. 조건 없이 주시는 모든 것을, 그것이 자신의 입에 맞든지 맞지 않든지, 취사선택 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자아를 완전히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행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아내(인간)의 권고에 따른 결과로 아들을 낳았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교우들 모두가, 새롭게 열린 부활절을 시작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