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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위의 하느님 나라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은 잘 익히고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어 잔치를 차려주시리라."(이사야25:6) 때로 나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이 언제나 새로운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그것이 전혀 부당한 일이라는 느낌도 든다. 예수께서, 근본은 하나인 설교를 여러 다른 방식으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께서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느님 통치"라고 부르신 것이 지금 여기에 실현되고 있다고 선언하셨다. 계속하여 "그것은 이와 같다"(마태 13장)고 말하면서, 당신한테는 분명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분명하지 못한 무엇을 이야기로, 비유로, 은유로 보여주고자 하셨다. 종교는 은유의 언어를 쓸 수밖에 없다. 현실을 초월한 무엇을 가리켜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 '신비'가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 예컨대, 오늘 읽은 이사야서의 잔치는 '지금'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현실이면서 '앞으로' 이루어질 현실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물의 안이 그 바깥보다 언제나 더 크다는 사실을 보라고, 보되 옹글게 보라고 말씀하신다. 기본적으로 "그 나라"를, 내가 이 글에서 쓰려고 하는 "큰 그림"이란 말로 바꿔 읽어도 된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 통치는 "사물이 객관적으로, 진실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존재하는 방법"이다. 예수는 우리를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꿈, 상처, 일감 따위에 실종되지 말고, 최후의 완성된 그림 안에서 살라고 끊임없이 초대하신다. 날마다 순간마다 이렇게 스스로 물어보라는 얘기다. "영원의 빛에서 이 일은 과연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감정, 상처, 애착, 계획 등을 철저히 상대화하고 각각 제 자리를 잡게 하는 '하나의 대하드라마'가 있다. 당신이 하느님 안에 거할 때, 작은 자아는 언제나, 제한되고 불안하고 그러면서도 좋지만,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자기가 진실로 그리고 최후로 누구인지를 알려면 자기를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완성된 그림을 보아야 한다. |되묻기| - 나는 나의 참 자아와 거짓 자아를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