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래로 내려가는 세례자 요한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가1:8) 세례자 요한의 성품이야말로 개인이나 단체의 순수한 변혁을 위해서 가장 드물지만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우리가 강림절에 세례자 요한을 주목하고, 예수께서 그를 신임하여 성전 밖 들판에서 베푸신 세례의식을 용납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그를 훨씬 넘어 더 멀리 나아가신다. 물은 그릇에 지나지 않고, 불과 성령이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이라고 요한은 말한다. 하지만 위대한 요한처럼 되지 않으면 우리는 틀림없이 자신의 초라한 그릇으로 그 안에 담길 내용을 대신할 것이다. 종교의식들로 하여금 우리 너머에 있는 무엇을 가리키게 하는 대신, 그것들에 스스로 갇히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오만과 겸손, 도덕과 신비, 철저한 예언활동과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삶을 절묘하게 자기 안에서 일치시킨 사람이다. 사제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삶의 터를 강변에 잡았고, 특권층 신분으로 누더기 옷을 입었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 수퍼스타였고,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진짜 세례는 "불과 성령의" 세례라고 말했다. 그를 두고 예수는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마태11:11)고 하셨거니와, 과연 그는 살아있는 역설이었다. 요한은 잡았으면서 잡지 않았다. 그가 드라마에서 일찌감치 퇴장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짧지만 중요한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냈다. 그의 탁월한 영성은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요한이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아직 성공의 탑을 세우기 전에, 자기를 비우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에고는 뒤로 밀쳐졌고, 그래서 자신의 에고, 자신의 메시지, 나아가 자기 목숨까지도 놓아버릴 수 있었다. 그의 목이 잘려 쟁반 위에 놓인 진짜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떤 재치 있는 사람이 '에고'를 '하느님을 변두리로 몰아냄'(Edging God Out)의 약자로 풀어 읽었다. 우리는 오히려 에고를 변두리로 몰아내어, 자기를 비워야 한다. 아니면, 요한처럼 자기를 넘어 예수를 가리킬 수 없다. 그런데 그 자기-비움이란 우리 맘대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겸손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수천 번 자기를 포기하고 수만 번 자기를 내어드리는 행위의 열매로 맺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세례자 요한은 날마다 순간마다 자기는 작아지고 그분이 커지기를 바라면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셔 들였다. |되묻기| - 나의 영성은 위로 올라가는 것인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