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 1:16~25) - 로마서 묵상 5 16절 : 복음을 부끄러워한 자들이 있었습니까? - 있었습니다. 부끄러워한 정도가 아니라 싫어하고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십자가의 도(道)란 무엇입니까? - 내가 죽어 네가 살고 그래서 나도 산다는 가르침이요, 그 실현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먼저 네가 죽어줘야겠다는 이 살벌한 ‘무한경쟁’ 시대를 신명 나게 살아가면서, 어떻게 ‘십자가의 길’을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오늘날의 이 세상이 거북하지 않다면 어딘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 본래 참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참말 그 자체가 힘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여 거짓말쟁이가 되면서 말이 힘을 잃었습니다. - 복음을 전하는 자는 참말을 전하는 자입니다. 삶이 거짓되면서 참말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참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를 쓴 바울도 복음을 전하러 나서기 전에 중생(重生)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물론 거짓된 사람이 복음을 전해도 힘은 발휘됩니다. 그러나 그 힘은 생명을 살리는 참된 힘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사악한 힘입니다. 이는, 힘의 근원이 복음에 있지 않고 사람한테 있기 때문입니다. 17절 : ‘음성상화’(音聲相和)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내는 소리를 음(音)이라 하고 듣는 소리를 성(聲)이라 합니다. 내는 소리만으로는 온전한 소리가 될 수 없고, 듣는 소리가 없다면 내는 소리도 없을 것입니다. 복음도 내는 소리인 이상, 마땅히 듣는 소리로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복음이 됩니다. 그런데 듣는 소리는 듣는 귀에서 나옵니다. 이 듣는 귀를 ‘믿음’이란 말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듣는 소리가 내는 소리를 온전하게 하듯이, ‘믿음’은 ‘복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는 소리가 없다면 어찌 듣는 소리가 있을 것이며, 듣는 소리가 없다면 듣는 귀는 또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믿음은 시작이면서 마침이 되어, 복음을 들음에서 비롯되어 복음을 들음으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짭니다. 온 세상을 구원할 큰 능력을 지닌 복음이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허공을 울리는 메아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며, 복음과 믿음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18~20절 : ‘있음’에 나아가 ‘없음’을 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온갖 사물을 보며 그것들을 있게 한 ‘보이지 않는 무엇’을 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으니까 보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데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거기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함’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안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교만하고 방자한 인간의 머리 위로 내리는 온갖 재앙을 누가 막거나 피할 수 있겠습니까? -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과 함께 세계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21~23절 : 인간이 스스로 똑똑하고 지혜로워서 그래서 어리석어졌다는 얘깁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니까 결과는 하나님을 모르고 짐승 모양의 우상을 하나님과 바꿔치기합니다. 무명(無明)이란 무엇입니까? - ‘그릇된 의견이나 고집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단지 인간의 처지에서만 보는 이른바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거다’하고 독선적으로 확정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무지(無知)입니다. 요컨대, 내가 좀 안다고 하는 게 탈이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스스로 보는 자는 먼저 그 눈을 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인간의 느낌이나 생각만으로 만사를 재단(裁斷:마름질,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신성모독이요 불의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4~25절 :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이 이 모양일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부모는 자식을 팔아 돈을 챙깁니다. 온통 돈, 돈, 돈으로 돌아버린 세상입니다. 부패를 막아주는 게 소금인데, 그 소금이 부패하면 그때는 어찌할 것입니까? 어둠을 비춰주는 게 빛인데, 그 빛이 빛을 잃으면 그때는 어찌할 것입니까? - 내버려 둡니다. 자고이래 국운이 이미 기울어진 나라가 다시 세워진 적이 있었나요? 근본이 썩기 시작했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무너지는 것을 그냥 버티지도 말고, 밀지도 말고,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내버림을 당하기 전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