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사렛 출신 예수 (요한복음 1:43~51) ”
우리는 저마다 출신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출신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당당히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태어나거나 자란 곳은 별 볼 일 없는 곳’이라는 편견 때문입니다.
온 세계의 왕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유대 사회에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은, 심지어 같은 유대인들에게조차 편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만나게 된 나다나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놀라운 만남을 안겨준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소개하는 빌립에게, 나다나엘은 다분히 편견이 가득한 표현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다나엘에게는 빌립의 경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나사렛 출신이라고 소개해준 순간부터 그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의 경험은 이렇게 ‘나사렛 출신’이라는 편견에 의해 우스갯소리가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빌립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 그를 초대합니다. “와서 보라!” 아무리 얘기해도 설득될 수 없는 편견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빌립은, 그러면 예수를 직접 만나보라고 권유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다나엘은 예수를 만나러 찾아왔고, 예수께서 그를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랍비로 알아보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당신이야말로 빌립이 말한 대로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편견은 오늘날 우리가 타인을 마주할 때도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특정한 이들을 향한 혐오와 배제, 악평 등으로 생긴 편견은 어느덧 쉽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어 타인을 판단하는 절대기준이 되었습니다. 직접 만나거나 경험한 이들, 또 ‘와서 본’ 이들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혐오의 말들과 배제의 언어들만 허공에 둥둥 떠다닐 뿐입니다. 그저 사회의 속설이나 편견으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너희가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다고 장담하는 그곳에서, 어디에서도 시작될 수 없는 선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어?” 하면서 쉽게 판단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쉽게 맛보지 못한 구원의 주인공일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처럼 확신에 찬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처럼 의심해도 그리스도께 다가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길은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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