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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룻기 공부 ⑧ - 타작마당의 밤 (룻기 3:1~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0절) 젊은 여인으로부터 강렬한 구혼을 받았으니 이제는 나이 많은 보아스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10절) 하고 축복합니다. 내 딸아는 히브리어 비티의 직역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이보시오 젊은이, 여호와께서 댁에게 복 주시기를 바라오.” 정도일 것입니다. 2장 8절에서도 이 말이 한 번 나왔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도 바로 내 딸아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에도 우리 경우라면, “이보시오 젊은이.”로 불러야 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인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헷세드는 우리 문맥에서는 가족으로서의 성실성을 뜻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한 가문의 며느리로서 그가 보여준 성실한 태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한 말 중 이해하기 복잡한 것은 처음과 나중입니다. 룻이 처음에 보인 성실성은 무엇을 가리키고, 나중에 보인 성실성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룻이 처음 행한 인애는, 그가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베들레헴까지 함께 와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룻의 나중의 행위는 이중적이라고 봅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구혼을 한 것은, 한편으로는 엘리멜렉의 가문을 잇기 위해 며느리로서 한 갸륵한 행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아스로 하여금 시형제 결혼의 의무를 시행할 기회를 준 것이라고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룻이 시어머니에게 한 첫 번째 성실한 행위도 갸륵하지만,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결혼하는 것은 더욱 갸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능한 여인 룻 (11절) <개역>에서는 보아스가 룻더러 현숙한 여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는 에셋 하일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이 히브리어 표현을 강조하는 것은, 룻기의 이야기꾼인 저자가 일부러 이 표현을 골라서 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의 이야기꾼이 2장 1절에서 보아스를 소개할 때, 보아스를 유력한 남자라고 합니다. 그 유력한 자라는 말을 히브리어로는 이쉬 깁보르 하일이라고 합니다. 보아스를 일컬어 이쉬(남자) 하일(유력한) 이라고 하고 룻을 일컬어 에셋(여자) 하일(유력한)이라고 하면, 두 사람 모두 하일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이미 이 두 사람을 짝지으려고, 짝이 될 수밖에 없는 천생연분의 인연을 찾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가 2장 1절의 본문을 읽을 때 본 것과 같이, 하일이란 말은 힘 센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말 <개역>은 이 말이 남자에게 적용될 때에는 유력하다(부자;부호)는 뜻으로, 여자에게 적용될 때에는 현숙하다는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에셋 하일은 경제력을 가지고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유능한 여인이라는 뜻인데, 룻도 바로 이런 유능한 여인이었습니다. 생각해보기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 하나님의 은밀한 인도하심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도하심에 룻이 어찌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룻은 단지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하게 나를 인도하십니다. 나는 룻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사는지요? 룻기 공부 ⑨ - 타작 마당의 새벽 (룻기 3:14~18) 이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이른 아침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에, 세 사람이 잠을 설쳤습니다. 보아스와 룻은 둘이서 밤을 새웠을 것이고, 이 일을 꾸민 시어머니 나오미는 혼자 가슴 조이며 며느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룻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엉겁결에 시어머니가 한다는 말이 “너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개역> 본문에서는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라고 물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아래 여백에 있는 주를 보면, 히브리 원문에는 “너는 누구냐?”로 되어 있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밤중에 보아스가 자기 옆에 바싹 다가와서 누워있는 룻을 보고 물었던 말도 “너는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동안에 두 번씩이나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룻은 과연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룻기>입니다. 보아스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라서 물었겠고, 나오미는 알면서도 누구냐고 물은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이것과 비슷한 용법이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의외의 친구를 만났을 때 흔히 “야, 이게 누구야?” 하고 물으면서 부둥켜안는 것 말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보아스에게 보내 놓고 무척 조마조마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벽같이 며느리를 만났으니 “얘야, 너 누구니?” 하고 말할 만도 했을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기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모두 보고합니다. 그리고 가지고 온 보리도 보아스가 시어머니에게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하면서 되어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3장 15절과 17절에는 보아스가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었다고 합니다. 무엇으로 여섯 번 되었는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보리를 될 때 쓰는 어떤 그릇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에바였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시어머니에게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데, 그 빈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어 레이캄은 텅 빈 것을 뜻하는 말로써, 이미 1장 21절에서 나오미가 베들레헴 아낙들에게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레이캄) 돌아오게 하셨느니라.”하고 말할 때 한 번 썼던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다 잃고 텅 비어 돌아온 겁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나오미의 텅 빈 곳을 이제 곧 메꾸어 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비어 있는 곳을 채워주시리라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시어머니는, 또 보아스가 룻을 시켜 보리를 낸 뜻도 깨달은 시어머니는, 보아스가 이 일을 빨리 추진하여 성사시킬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며느리에게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는 가만히 집에 들어앉아 있으라.”(아샤브) 하고 말합니다. 2장도 아샤브(거주하니라)로 끝나는데, 3장도 아샤브(앉아 있으라)로 끝납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할 여부를 결정하는데 오늘 하루를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가 약속한 것이니, 룻이나 나오미로서는 기다리는 일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기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때를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나도 그때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때를 살고 있나요? 하나님의 때인가요, 아니면 나의 때인가요? 우리에게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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