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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공부⑦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시141:8~9, 약1:12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 있는데, 그 제목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교회 안팎에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던 소설입니다. 복음서에 없는 내용을 가정해서 썼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그것은 뭐 거창한 게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었다고 합니다. 사탄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겪는 고통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가리켜 보입니다. ‘십자가에서 도망쳐서 어느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감쪽같이 숨어서, 막달라 마리아를 아내로 삼아 아이를 낳고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사람의 욕망은 이중적입니다. 비범해지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는가 하면, 평범하게 살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은 유혹은, 비범해지고 싶은 욕망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이기는 하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받은 유혹은, 평범해지고 싶은 유혹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욕망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가리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데 나를 돋보이게 하는 욕망은 우리를 삼키는 수렁이 되고, 위기가 닥쳤을 때에 평범하게 살고 싶은 욕망은 아주 비굴하고 치사한 삶으로 통하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남과 같지 않으면 불안해하면서도, 남과 다르게 자기를 구별하고 싶은 이중적 욕망 속에서 삶은 늘 여유가 없이 숨 가쁘기만 합니다. 비범하게 살아야 하나, 평범하게 살아야 하나, 이런 줄타기를 하는 가운데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하와가 눈을 들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을 때, 하와의 가슴에 일기 시작한 욕망은 불길하고 꺼림칙하기는커녕 휘황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 하와가 받은 유혹은 성서를 읽으면서도 불경스럽게 “야, 나라도 어쩔 수 없었겠다.” 탄식하게 만듭니다. 사탄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무너뜨린다면, 힘닿는 데까지 버틸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은밀하고 강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곤 합니다. 들릴라에게 자신의 비밀을 다 털어놓은 삼손처럼 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물론 눈 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육 수단으로 시험이 있음을 압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이르기 위해 광야라는 시험(훈련)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신앙은 약속된 삶이지 완결된 삶이 아니기에, 약속의 새 땅에 도달하기까지 물과 불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과 불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부터 날씨가 갑자기 서늘해져서 일교차가 커졌고 그만큼 우리의 육신은 적응하느라 쉽게 피곤하지만, 우리에게 이렇게 신선한 공기와 깨끗한 대지를 선물로 주지 않았습니까.. 삶의 길을 가로막는 장벽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가야할 길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만 있으면, 어떤 시험을 당하여도 그것을 오히려 자신을 깨끗이 하고 발전시키는데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고,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있고, 불평과 원망을 감사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을 건물의 모퉁잇돌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버릴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에서 숫돌이 될 때, 우리를 깎아 날카롭게 만드는 온갖 시험과 시련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사탄의 유혹이 우리를 붙잡을 때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입니다. 사탄은 모든 관계에 파고들어 틈을 만들고, 그 틈에 먼지처럼 은밀하게 쌓여가다가는, 때가 되면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아 버립니다. 이렇게 사탄의 노예가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간데없고, 서로 경쟁하여 싸우기만 할 것입니다. “내가 이 나라(교회)를 세우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떻게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물려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분명히 의심해 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허깨비에 사로잡힌 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남이가?” 할 때의 그 ‘우리’ 말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이 있는 이들끼리의 작당으로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 되어갑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했던 초심은 내팽개치고, “까짓 것,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사는 게 뭐 별거냐,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서 사는 거지.” 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변신해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탄은 참 좋겠습니다. 자기 사람이 자꾸만 생기니까 말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게 이러하니 우리는 더욱 정신을 차려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세상에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뒤엉킨 구석이 아주 없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를 넘보려고 먼지처럼 접근해 오는 사탄을 향해 “물러가라!”고 외치지 않으면, 우리는 대번에 사탄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사탄이 먼지처럼 우리 속에 깃들인다면 날마다 날마다 쓸고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쓸고 닦아도 닦이지 않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절망스럽게 했던,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탄식하게 만들었던 그 한계 말입니다.
그 한계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자는 기도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사탄을 이길 힘은 오직 빛이신 하나님한테서 오는 줄 믿습니다. 욕심으로 누렇게 바래버린 일상에서 기쁨의 빛과 생명의 온기를 되찾아 줄 힘은 오직 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간절히 기도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사람이 산다는 것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함께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싶다. 우리 삶의 모든 기쁨과 슬픔도 결국 사람에게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중심이 아닌 조건들에 불과하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개개인은 모두가 소중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얼마나 메말라가고 있는지 모른다. 인생을 살면서 잊지 않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사람을 소중히 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