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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리스도 (로마 5:12~19) - 로마서 묵상 16 12~14절 : 벌레가 나뭇잎 하나를 갉아 먹는 것, 그것은 나무를 갉아 먹는 것입니다. 내 심장에 병이 든 것은 내가 병든 것이고, 따라서 병원에 가는 것은 내 심장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넘어진 것은 곧 인류가 넘어진 것입니다. ‘인류’라는 몸 밖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율법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를 없애주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율법은 다만 죄를 죄로 알아보게 할 따름입니다. -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데, 그러면서 거기에서 헤어나는 길을 찾지 못해 절망에 빠져 있는데, 그들에게 삶의 길을 보여주고 열어주고 그리로 이끌어줄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사람의 아들’(人子)이라고 했습니다. -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사람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먼저 얻었는데,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은 이름입니다. 그가 세상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아담’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예수의 표상(表象;상징)인 것입니다. 15~16절 : 아담과 그리스도(예수)는 완전히 같으면서 완전히 다릅니다. ‘모두’의 운명을 결정한 ‘하나’라는 점에서 같고, 누구는 ‘모두’를 죽음으로 이끌고 누구는 ‘모두’를 생명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그릇’은 똑같은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이 정반대로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과 아담의 죄는, 그 효과에 있어서 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의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은총의 경우에는 죄를 지은 많은 사람이 은총을 거저 입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공동번역) 17~18절 : 두 사람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같은지, 아울러 그 결과의 내용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합니다. - 예수께서 “나는 길이다.” 라고 하신 것은, 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죽음을 가져오고 예수는 생명을 주십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같으면서 다릅니다. 19절 : 아담이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천명(天命)을 어기는 것은 곧 천명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준엄한 명령이라 해도 그대로 따르는 자가 없다면 죽은 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명은 그것을 순종하는 자로 말미암아 살고 불순종하는 자로 말미암아 죽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천명을 죽인 것이며 따라서 자기를 죽인 것입니다. 반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당신의 뜻을 비우고, 그 자리에 아버지의 뜻이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명(天命)을 살린 것이며, 따라서 자기를 살린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음을 낳고, 산 자는 생명을 낳는 법!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순간순간 자기의 뜻을 비우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살게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