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천천히
작성일 2019-11-02 (토)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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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신경 공부 6 ”

사도신경 공부 ⑥ <재림, 심판, 성령> 사도행전 1:6~11, 2:1~4

오늘은 사도신경 특강 여섯 번째 시간으로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주님의 재림심판에 관한 부분과 성령에 관한 고백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시 오실 분은 하늘로 오르신 바로 그분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고백해왔던 ‘저리로서 오실 주님’은 실은 잘못된 어법입니다. ‘거기로부터 오실 주님’으로 고쳐 읽어야 합니다. 거기는 바로 하늘이겠지요.

우리는 하늘로 오르신 주님이 다시 오실 분임을 믿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이”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오심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심판, 하면 우리는 일단 천국과 지옥을 생각합니다. 그만큼 심판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인가요, 많은 사람이 심판 날, 하나님 앞에 펼쳐져 있을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없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면 심판은 정말 두려운 현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오실 주님은 바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해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구원사역의 계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들추어내 벌을 주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오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심판은 오히려 믿음의 완성이요 의의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 앞에 서면, 우리는 추하고 흉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치유가 올바른 진단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구원에 대한 목마름은 자신의 실상에 대한 적나라한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심판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추한 모습을 주님께 인정함으로써 심판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의 초대가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구원의 초대 앞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이 내리실 최종적인 선고가 남아있습니다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오늘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부의 리듬에 따라 살아갈 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과 염려로 자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듭니다. 심지어 사랑조차 의무가 됩니다. 예배와 기도와 봉사가 오직 심판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두려움일 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에 무슨 말을 덧보탤 수 있겠습니까. 덧보탠다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옷을 입은 미움일 뿐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대접하고, 나그네를 환대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병든 사람을 위로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보는 일”이 의무감에서라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인생은 고달프기 한량없는 유배생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고대하는 마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거기로부터 /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 주님을 믿습니다.” (복창)

21세기, 교회의 관심은 영성입니다. 바야흐로 영의 전성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성에 관해서 말하지 않으면 왠지 시대에 뒤진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영성에 대해 한두 마디쯤 할 줄 알아야 명함이라도 내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도와 티베트 불교에 관심이 고조되고, 무속인들의 광고가 신문을 도배하고, 공자와 노자 강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가 메마르고 척박하고 천박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지금 목이 마른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영의 세계에 관해 아는 것은 오직 우리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서구의 신학이 그리스도론에 집중됨으로써 영이 빠져있다는 자기반성을 하고 있을 때, 1970년대 이후 이 땅의 많은 부흥사들은 영의 세계를 모르는 신학자들이 한국의 신학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령운동에 열중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급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가?’ 생각해보면 이곳저곳에서 반성과 회개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그러면서 어떤 이들은 성령이 이미 한국을 떠났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하는 것인데, 어찌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가볍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14:26) 성령은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뒤덮고 있는 욕망의 비늘을 벗겨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 두려움과 절망과 슬픔의 너울을 벗겨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은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성령이 임한 곳에 그리스도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생명을 일으켜 세우고, 인간의 생각으로 찢어지고 나뉘었던 것을 하나 되게 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 이런 믿음과 영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성령 받겠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친다고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마음대로십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란, 예수님과 달음 사람입니다. 그의 눈빛이, 말씨가, 몸가짐이, 마음가짐이,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예수님을 닮았다면 그가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은사를 받았다 해도, 그 사람한테서 예수님을 느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진짜 같은 가짜일 뿐입니다. 성령을 받겠다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으로 성령 받은 사람은 찾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도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은 못난 자아를 꺾기 위해 우리를 세차게 몰아붙이기도 하지만 결코 짓누르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후3:17)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압도하는 모든 무거운 짐들을 벗겨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복창)

다시 온다고 약속하신 주님,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우리의 믿음의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늘 깨어 준비하게 하옵소서. 심판 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훈련시켜 주옵소서. 보혜사 성령님, 우리가 찬송할 때마다 진심으로 소리 높여 찬양하게 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 곁에 계셔서 주님의 뜻을 일러 주옵소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속에서 빛과 진리를 보게 하옵소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온유해지고 겸손해져서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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