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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공부③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출20:7, 레19:12, 신5:11
텔레비전에서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누구를 저주하고 싶을 때 종이에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이름을 써 놓은 다음에 거기에다 활을 쏘았습니다. 옛날 이집트에서는 저주문서라는 것이 있었는데, 자기 원수들의 이름을 항아리 속에 써넣고 그 항아리를 깨면서 저주를 퍼부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이처럼 사람의 이름은 그 존재와 같은 것이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과 처음 만나서 인사할 때 제일 먼저 통성명부터 하는 것은, 서로 이름을 주고받음으로써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이 천사와 밤새껏 씨름하고 헤어질 때 천사가 그의 이름을 묻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이제부터는 네 이름이 이스라엘이다.”고 새로운 이름을 지어줍니다. 욕심꾸러기 야곱,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야곱은 ‘빼앗는 자’라는 뜻을 지닌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가지고는 새로운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부터 바꿔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통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이름을 바꿨다는 것은 그 존재가 새롭게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이름은 곧 그의 존재 자체와 같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 세 번째 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함부로,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금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 계명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나갈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욕설은 대개가 성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지만, 오래 전부터 기독교 국가인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욕설이 주로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쉬운 예로서, God damm 같은 욕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입에 담을 수 없는, 하나님과 관련된 욕이 많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들먹거리면서 상스러운 욕을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무엇입니까? 이름은 그 이름을 갖고 있는 존재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고 사귀려면 먼저 그 사람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인격적인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섬기려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시나이 광야 호렙산 가시덤불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본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누구십니까?” “당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십니까?” 당돌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절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나다(스스로 있는 자).”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듣습니다. “너희는 어떤 말로도 나를 규정할 수 없도다. 너희는 다만 나를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숨기면서 드러내고, 드러내면서 숨기는 자다. 그러니 나를 전부 알 생각은 말아라. 순간순간의 경험으로 너희는 나를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또 진실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자주 여호와(야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여호와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울림도 그리움도 경외함도 없이, 지금 하나님의 이름이 뜻 없이 불려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껏해야 병을 고칠 때나, 아쉬울 때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고자 할 때나, 위기가 닥쳤을 때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하고 부릅니다. 그 외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한 하나님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오늘의 계명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지 않고, 오로지 병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는 이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또 기복적인, 무속적인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계명입니다. “누구에게 가면 기가차게 병을 잘 고쳐준다더라. 그러니 어서 그 분에게 가 봐라.” 아니면 “어느 교회에 가면 복 받는다더라. 그러니 어서 거기에 가 봐라.” 하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누군지도 전혀 모르는 이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교회를 찾아옵니다.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병 낫고 물질 축복 받는 데만 관심 갖고 찾아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진 않았지만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스게와 제사장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바울 사도가 두란노에서 사역할 때 성령의 능력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가 사용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의 몸에 대기만 해도 귀신이 달아나고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 지역의 마술사들이 바울 사도를 흉내 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도 ‘예수의 이름’을 주문처럼 부르며 영업을 했던 것입니다. 그 지역에 스게와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일곱 명 있었습니다. 그 아들들도 바울 사도를 흉내 내어 예수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악귀가 그 아들들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하고 그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은 결국 창피만 당하고 상처를 입은 채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 아들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이 이름만 불러댔다는 점입니다. 마치 예수의 이름 자체에서 능력이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주문을 외우듯이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그분의 인격과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이름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 이름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공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마술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또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찬양과 경배를 받아야 할 거룩한 이름이지, 그렇게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될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띠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오늘의 계명은 치유 행위 등 신통력 말고도, 우리의 사적인 욕구를 채우는 행위에서도 다 적용됩니다.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운운한다거나, 누구를 비방하기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은 다 오늘의 계명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유대인의 속담 중에 “인간은 생각하고 하나님은 웃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웃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마술로 바꾸고,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의 사리사욕과 제도에 묶어두려 할 때 하나님은 웃으십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복창)
시편을 보면, 시인들은 저마다의 하나님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반석, 피난처, 목자, 빛, 구원...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부를 때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것을 체험해보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반석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정처 없는 삶의 부산스러움을 맛보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피난처, 혹은 목자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본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빛이라 부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아니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낯설게 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낯설게 한다... 하나에 안주해서 그것이 다인 양 착각하지 말고, 날마다 새로운 체험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의미를 더해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느끼는 것이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느끼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구하는 것보다는 이미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말과 행동과 나날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게 하옵소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