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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성형외과 의사이면서 자아개발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맥스웰 몰츠’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비인격적인 요소를 인격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등산을 하기로 계획했는데 비가 온다거나, 바쁘게 공항에 가야 하는데 차가 막힌다거나 하면, 사람들은 대개 “내가 어디 가려고 하면 꼭 비가 와!”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그래서 불쾌하다는 감정이 들고 자기는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98.6%가 이른바 SKY대학에 갈 수 없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라면 그것은 비인격적 요소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나의 탓을 하면서 내가 게으르다, 공부를 안했다, 실패했다고 인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과 경쟁 풍토 속에서는 전 국민이 불행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경쟁에서 승리한 1.4%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의사는 강의와 수술 등 너무나 바쁜 일과 속에서 구내식당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녀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신도시에 병원을 개업한 한 의사는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주변에 병원들이 많이 생겨서 자기 병원이 문을 닫지 않을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잘 나가던 어느 검사는 갑자기 귀농하여 농사지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검사시절에는 행복하지 않았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검사 시절에는 햇빛을 본 적이 거의 없고 사무실과 시체 안치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자기 친구 검사들이 행복한 이는 열에 한둘 될까말까라고 했다.
결국 1.4%에 들어간 사람이나 못 들어간 사람이나 그 사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닌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 그룹에 들어가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우울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25절)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또 이런 저런 걱정을 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살다보면 중요한 것의 순서가 뒤바뀐다. 이 한 목숨 잘 살아보자고 걱정을 하는 것인데, 이제 걱정이 심해지다 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병이 걸리기도 하고 목숨이 위태로워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소중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걱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걱정하다”(merimnao) 또는 “걱정”(merimna)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보면, 그것은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위에서 눌러서 질식시킨다는 그런 의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라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가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마 13:22). 즉 염려는 우리 안에서 말씀이 살아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를 일러바쳤을 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고 하셨다(눅 10:41).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우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눅 21:34). 하지만 한 시라도 걱정하지 않으면 세상 일이 제대로 돌아갈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26a)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다. 여기에서 사용된 “보아라”(emblepsate)라는 단어는, 하늘을 나는 새를 실제로 “눈여겨보라”는 뜻이다. 교회 주변을 돌다보면 산비둘기나 까치들이 쌍으로 혹은 무리를 지어 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운이 좋으면 박새의 귀여운 날갯짓도 보게 된다. 언젠가 직박구리를 보고 하도 예뻐서 사진을 찍은 적도 있다. 세상에 새처럼 행복하게 생긴 동물이 또 있을까. 날씬하고 기분 좋게 생겼다. 더욱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지저귀는 소리도 예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행복해진다. 예수는 그것들이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마치 놀고먹는다는 것 같다. 하지만 새들도 생존하고 또 새끼를 기르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벌레를 잡으러 다니는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신다고 하신다. 왜 그렇게 말씀했을까? 어쩌면 언제보아도 명랑해 보이는 새의 기분 좋은 모습 때문에 예수는 새는 걱정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흔히 머리가 나쁜 사람을 새에 빗대어 놀리곤 한다. 그만큼 새는 별 생각이 없는 동물이다. 예수는 어쩌면 우리가 너무 걱정이 많은 것 그것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를 보라고 하는 것은, 새처럼 단순하게 살라는 것이다. 생각을 버리고 그저 벌레가 있어서 그걸로 배를 채웠으면 행복하게 하늘을 날고 지저귀는 생각 없는 새처럼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상가 ‘코이케 류노스케’는 <생각버리기 연습>이라는 책에서 아주 오래된 명상법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온갖 근심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 근심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버리고 그저 숨쉬기에 열중하고 또는 음식 먹을 때는 그 맛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무심코 듣기보다는 귀 기울여 듣고, 무심코 보기보다는 눈여겨보는 방식으로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음을 감각적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근심은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고대 명상법이 예수가 말한 “새를 보아라!” 할 때 그 보는 법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새와 같이 살아 있는 것들을 눈여겨보면서 거기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또 세상 걱정 없이도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손길을 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b)
예수님은 지금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관심은 언제나 새보다도 귀한 우리에게 있다. 이것을 문학적 방식으로는 낚시하기에 비유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를 할 때쯤 예수는 우리를 낚아채신다. 새를 보면, 도구도 없이 그저 나뭇가지 물어다가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지만 거기에 알도 낳고 새끼도 기른다. 농사도 안하고 창고도 없지만 참 건강하고 예쁘다. 참 오묘하다 싶어서 감탄을 하고 있을 때쯤, 예수는 “너는 새보다 귀하잖아!” 그러니 하늘 아버지께서 너에겐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겠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 낚이는 순간 세상 근심은 천리만리 사라진다. ▣ - 마태 6장 25~26절 |